사람냄새 나는 기자 #1

 

‘얼굴’은 안면(顔面)을 칭하는 해부학적 용어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본다면 ‘얼굴’의 속뜻에는 신체기관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얼굴’의 ‘얼’은 영혼을, ‘굴’은 통로를 뜻하는 순우리말로 둘을 합치면 ‘영혼의 통로’가 된다. 실제로 얼굴은 타인을 구별해주는 가장 일차적 척도로 작용할 뿐만 아니라 80개가 넘는 근육의 움직임을 통해 속마음 깊은 곳까지 비춰준다. 혹자는 ‘영혼의 통로’라는 표현이 과하다고 느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얼굴이 사람의 내면을 대변한다는 사실에는 동감할 것이다.

 

코로나를 겪는 지금은 이야기가 조금 달라졌다. 얼굴의 반 이상을 가려버린 마스크로 인해 상대의 내면은 고사하고 서로의 신변조차 구별하기 어려워졌다. 하얀 마스크 위로 빼꼼 나온 눈만으로는 마주하고 있어도 도통 소통한다는 느낌을 받기 어렵다. 어쩌면 코로나 시대 얼굴은 ‘영혼의 통로’라기보다 ‘안면’이라는 사전적 의미에 가까운 것 같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거추장스럽게만 여겨진 마스크 착용은 우리에게 편안함을 선사했다. 우리는 더 이상 애써 ‘사회적 표정’을 짓지 않아도 된다.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얼굴근육을 잡아당겨 부드러운 표정을 만드는 일상의 수고는 전에 비해 확실히 줄었다. 마스크를 쓰면 산소가 부족해진다지만 오히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편히 숨 쉴 수 있게 됐다.

 

여태 인상에 부정적인 말만 들어온 나 역시 마스크가 내심 반갑다. “안 좋은 일 있어? 인상 좀 피고 살아.” 코로나가 발생하기 이전에는 하루가 멀다고 들어왔던 말이지만 바이러스가 장기화되며 좀처럼 듣기 힘든 말이 됐다. 마스크는 언제 취업하냐는 어른들의 잔소리에 싸늘해진 입가를 가려주고 반갑지 않은 동창을 만나 호들갑 떨 때 짓는 인위적 웃음을 그럴싸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마냥 좋아하기엔 마음 한 구석이 걸린다. 편한 것과 좋은 것은 동의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종종 바이러스라는 명분이 없던 시간들을 떠올려본다. 미세한 표정까지 낱낱이 드러나는 맨얼굴로 서로를 마주해야 했던 순간들, 상대를 배려한다고 애써 미소 지은 순간들, 가까이서 침을 튀겨가며 떠들던 순간들... 돌이켜 보면 전부 내가 피곤하게 여겼던 시간들이다. 그러나 청승맞게도 그 일상들이 그리울 때가 있다. 서로를 향한 수고로움이 가져다주는 사람 사이의 가까움을 다시금 느껴보고 싶다.

 

안타깝게도 ‘뉴노멀(New Normal)’이라는 단어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전제하고 있다. 바이러스가 완전히 박멸되지 않는 한 우리는 서로 부대끼는 불편함을 이전처럼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바이러스가 의도치 않게 가져다 준 편안함을 그저 기쁘게 받아들이지 말자. 지금은 코로나가 정당화시키는 소통의 부재에 위기의식을 느낄 때이다.

 

‘영혼의 통로’인 얼굴이 가려졌다고 해서 서로를 향한 마음까지 단절되라는 법은 없다. 하얀 마스크로 덮여버린 얼굴 없는 사회에서 타인의 마음을 읽어내고 공감하는 일. 쉽지는 않겠지만 꽤나 도전해볼만 하다. 서로가 무리 속 얼굴 없는 행인으로 희미해지기에 나와 당신은 상상 이상으로 소중하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한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