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약 000이라면?”이라는 질문은 한동 공동체 속 다양한 “우리”들을 조명하고,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한 도전이다. 한동의 다양성 회복을 위한 외침이다. 한동은 공동체라는 믿음 아래 던지는 질문이다.

 

▲사진  황지민 기자 hwangjm@hgupress.com

1.    휄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우가 함께 공부하고 있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린다. “휄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우가 함께 공부하고 있습니다.”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엘리베이터 앞 게시물의 한 글귀를 무심히 지나친다. 엘리베이터에서 “장애우”를 마주해본 일은 없지만, 해당 게시물은 너무도 익숙하다.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꺼내고 엘리베이터가 내려가길 기다린다. 문득 한 생각이 스친다. ‘원래 장애우라는 표현을 쓰나?’ 이 기획은 거기서부터 시작했다. 이번 기사에서는 상담심리사회복지학부 이지선 교수 (이하 이 교수)와의 인터뷰를 통해 일상적 표현에서부터 인식까지, 한동의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돌아보고자 한다. 본격적인 질문에 앞서, 우리는 장애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인식해야 할까?

[Q1.우리는 장애, 그리고 장애인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보통 우리는 장애는 신체나 정신 기능에 손상이 있거나 결함이 있어서 능력이 없는 상태라고 알고 있어요. 영어단어 (disability)에도 그런 의미를 담고 있고요. 근데 장애를 이렇게 바라보는 시각은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고, 지능이 낮거나, 혹은 걸을 수 없는 상태 때문에 무엇인가를 할 수 없다는 능력 없음(disabled)의 상태로 이해하고 있는데, 보통 그 원인을 장애인 개인 안에서 두고 있어요. 그런데 같은 손상을 입은 장애인이 환경에 따라서 무언가를 할수 있는 상태가 되기도 하죠. 실제로 시각장애인에게 음성언어로 보이는 것과 똑같이 정보를 전달해준다면 시력없음이 문제가 되지 않아요. 우리 모두가 수어를 할 수 있다면, 청각장애인이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꺼에요. 보행장애인에게 계단이 아니라 경사로나  엘리베이터만 있으면 결과적으로 비장애인과의 차이가 생길 일이 없게 되죠. 환경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진다면 장애(무엇인가를 할 수 없음)의 원인이 장애인 개인의 손상에 있다기 보다는 환경 안에 있다고 봐야 할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회에 의해 장애를 겪는 사람 (people disabled by society)라고 이해하는 것이 맞을 것 같고요. 장애라는 것 자체가 의학적으로 더이상은 고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환경은 고칠 수 있잖아요. 능력을 개발하고 발휘할 수 있도록 적절한 환경이 주어지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이 교수의 의견은 장애학에서의 접근방식과 맞닿아 있다. 장애학은 ‘장애를 개인의 결함으로 보지 않고 장애를 규정하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요인 등을 탐구하는 다학제적 학문’으로 정의된다. 장애학은 장애를 치료 대상으로 규정하여 신체 정상성 회복의 차원으로 접근하는 의료적 모델이 아닌, 장애를 개인의 특성으로 보는 사회적 모델에 근거하고 있다.


1. “장애우”, 무엇이 문제일까?
“장애우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때에는 작은 도움을 주는 멋진 한동인이 됩시다.”라는 문장이 차별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먼저, 장애우라는 표현은 왜 문제일까?
[Q2.장애우라는 말은 친구를 의미하는 따뜻한 표현 같은데, 왜 문제라고 하는 것일까요?]
『친구를 뜻하는 우(벗 우)를 사용하는 거잖아요. 장애인을 좀 더 친근하게 대하고 싶고, 또 나는 장애인에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장애우라는 단어를 잘 써요. 그런데 우리나라 문화는 친구라는 표현은 나이가 비슷한 사이에 사용할때가 많죠. 여러분들 진짜 한 살만, 몇 개월만 차이 나도 언니오빠가 되는데, 친구라는 표현을 함부로 누군가를 지칭하는 언어로 사용하기 애매한 부분인 것 같아요. 어떤 경우엔 내 친구의 아버지가 장애를 가졌으면 그분을 친구라고 표현하게 되는 거죠. 반대로 내가 장애인인데, ‘친하지도 않은데 왜 친구라고 부르는 거야’ 이런 느낌이 들 수 있는 거거든요. 조금 더 나아가면 약간 낮춰 부르는 느낌이 생기기는 거에요. 유치원에서 “어린이 친구들~” 이런 느낌으로 (웃음) 장애인이라고 쓰는 게 맞는 표현이예요. 근데 한동에서는 서로를 학우라고 부르기도 하니깐 장애우라고 쓰는 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좀더 좋은 표현으로 장애를 가진 학우님 이렇게 쓰면 좋을 것 같아요(장애인 또는 장애를 가진 학우로요?) 네네.』

장애우라는 표현은 선의에 의한 결과이다. 장애우는 장애인을 멀리하던 사회 분위기를 극복하고자 만들어진 단어이지만, 외려 장애인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는 표현이다. 장애우(障碍友)는 ‘장애가 있는 친구’라는 의미이다. 불특정다수의 장애인은 자신을 친구로 여겨도 된다고 허락한 적이 없다. 태어나서 처음 마주한 사람을 친구라고 칭하는 것, 그리고 친구인 이유가 상대가 장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논거는 명백히 차별적이다. 더불어 “장애우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때에는 작은 도움을 주는 멋진 한동인이 됩시다.”라는 문장 역시 문제가 있다.

『사실 도움이 필요 없을 때가 굉장히 많거든요. 기본적으로 장애인이 도움을 요청할 때 도와주는 게 맞아요. 요청할 때 기꺼이 도와주는 사람이 고마운 거고. 한편으로는 장애인들은 뭔가 하지 못할 것이다 라는 편견을 계속 받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하는 반대욕구가 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에도 누군가 ‘시혜를 베푼다’는 느낌으로 도움 받는 것은 반갑지도 않고, 그런 게 때로는 차별이라고 느껴지는 거예요. 』

해당 문구는 앞서 언급한 “장애우”라는 단어의 차별성과 결합하여, 장애를 가진 사람은 당사자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배려가 필요한 사람”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준다. 해당 문구에는 장애인의 의사가 결여되어 있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존재하는 것이지, 모든 장애인이 매 순간 타인의 도움 없이 일상을 영위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해당 표현은 아름다운 의도와는 다르게 차별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 표현이다. 그렇다면 해당 사진의 문구를 바꾼다면 어떻게 바꿔볼 수 있을까? 

『차라리 엘리베이터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장애인에게 왜 필요한지에 대한 문구를 좀 깔끔하게 쓰면 어떨까요? “이 엘리베이터는 보행이 어려운 사람들이 우선 사용하도록 제공되는 것입니다” 라는 표현이 필요할 것 같아요. 우리 인식 속에 어떤 환경은 필수적으로 우선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 이걸 알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엘리베이터에서 마주한 사람이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로 타인의 도움이 필수적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말 도움이 필요하다면, 요청할 것이다. 진짜 “멋진 한동인”은, “장애”보다 “인”에 집중하는 태도를 가지는 사람일 것이다. 2011년 12월 31일, 게시물에 명시된 게시기간이 서글프게 느껴진다. 최소 9년간 편견은 그 자리에서 수많은 이들을 마주했다.

2. 한동은 준비가 되었을까?

입시 철이다. 토요일에는 한동대학교에 입학하길 희망하는 이들의 수시 면접이 진행 중이다. 한동을 희망하는 이들이 한동대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을지를 평가하는 셈이다. 그럼 반대로 한동대학교가 장애인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1*배리어프리”의 관점에서 한동을 평가하면 합격점을 받을 수 있을까?

『많이 부족하죠. 뭐 (웃음). 편의시설 같은 것도 그렇고, 시각장애인들 위해서 엘리베이터에 점자 표시, 각 건물에 중앙현관이 아닌 출입구에 경사로 설치되어 있는 것 정도로 많이 부족해요. 바닥에 점자블록도 거의 없고. 2015년 이전에 건축한 건물엔 적정설치기준을 갖춘 곳이 별로 없을 꺼예요. 화장실만 봐도 남여 각각 하나 이상으로 설치되어야 하고 문폭도 90cm이상으로 휠체어 드나들수 있게, 또 미닫이 문이나 자동문으로 설치 해야해요. 손잡이나 등받이도 있어야 하고요. 적정 설치 기준을 완벽히 갖춘 환경이 되어야 장애를 가진 학생이 한동에서 환경에 의해 장애인이 되지 않을수 있죠. 강의실 강단에 경사로도 없잖아요. 누군가 올려주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 굉장히 수치스러운 일이에요. 누구든 불명예스럽지 않게, 프라이버시를 잘 지킬수 있도록 하는 게 배리어프리의 목적이기 때문에 그런 환경을 갖추기 위해서 한동안에도 물리적 제도적 장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취재결과, 이 교수의 말처럼 현동홀 내 장애인 화장실은 1층에 남성전용장애인화장실 1개와 반대편 남성화장실 내 장애인 전용 칸 1개, 총 2개가 전부였다. 더불어 여성장애인화장실은 없었으며, “남녀공용장애인화장실”이라 명명된 곳에도 남자화장실 내 장애인 전용 칸이 존재할 뿐, 남녀공용장애인화장실은 커녕 여자화장실 내에도 장애인 전용 칸은 존재하지 않았다. 만약 여성 장애인이 현동홀을 방문했다면 “남녀공용장애인화장실”이라고 명명된 남자화장실 내 장애인 전용 칸을 이용하던가, 아니면 옆 건물인 느헤미야 홀 1층의 장애인화장실을 이용해야 하는 셈이다.
더불어 한동대학교 내 강의동(현동홀, 느헤미야홀, 뉴턴홀, 올네이션스홀, 오석관, 코너스톤홀, 언어교육원, 에벤에셀관, 김영길그레이스스쿨) 중 현동홀과 언어교육원을 제외한 모든 건물 내에 장애인화장실은 1층에 남,녀 각 1개씩 존재했다. 올네이션스홀과 뉴턴홀은 연결되는 지점에 장애인화장실이 존재했다. 코너스톤홀의 경우에는 음성안내와 자동문이 설치되어 있어 장애인화장실이 잘 구비되어 있었다. 다만 언어교육원의 경우 남자화장실 내 장애인 전용 칸이 존재했지만, 여자화장실 내에는 없었다. 장애인 전용 칸을 청소도구를 모아두는 창고 형태로 활용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는 장애인 화장실을 사용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한동 공동체의 인식을 방증한다. 장애인을 마주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시설 상 준비가 안된 것일까, 시설준비가 안되었기 때문에 장애인을 마주하지 못했던 것일까? 

▲사진  황지민 기자 hwangjm@hgupress.com

[Q3. 한동 공동체 안에서는 장애인을 마주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장애인이 없기 때문에 학교의 준비가 부족한 것인지, 학교가 준비가 안되었기 때문에 장애인이 없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내가 만약 보행장애인이라면 저는 합격해도 한동에 안 올 것 같아요. 솔직히 이렇게 다니기 불편한 학교, 안 올 것 같아요. 한동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누군가의 세상을 바꿔주고 싶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때문에 누구나 이 좋은 것을 경험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누릴 수 있도록 우리안에 존재하는 장벽을 허무는 데 특별히 더욱 노력을 해야할 것 같습니다. 물리적 환경뿐만 아니라 장애를 가진 학생에게 필요하다면 시험 시간을 늘려 준다던지, 타이핑에 어려움이 있다면 필기 대신해줄 사람을 도우미로 제공해준다든지, 시각장애인의 경우에 모든 파일을 음성으로 읽어주는 소프트웨어를 제공해준다든지, 저시력자들을 위해 프린트된 글자를 확대해서 볼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하거나, reader학생을 도우미로 제공해주는 등, 학교는 장애인의 필요에 따라 적극적으로 정당한 편의를 제공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준비를 해야겠죠.』


3. 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편견 개선,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할까?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수많은 편견과 고정관념을 가진다. 접촉은 편견을 해소하는 역할을 한다. 이지선 교수는 칼럼에서 “지속적이고 친밀한 접촉 경험을 통해 새 정보를 접하게 되며, 두렵고 불안한 감정이 아닌 편안하고 익숙한 쪽으로 옮겨 간다는 것”이 미국의 심리학자 고든 올포트의 '접촉 가설'이라고 밝혔다. 더불어 집단 간 접촉이론이란 “내가 속한 집단과 다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친밀하고 대등한 관계 속에서,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함께 협업하는 만남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면 외집단에 속한 사람들에 대해 가졌던 인식이 긍정적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한동에 존재하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 벽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일단 마주해야 한다.
『저는 우리 사랑의 마라톤이 되게 좋은 것 같아요. 집단간 접촉 이론 상. 아주 짧은 경험이지만 학생들이 장애인의 삶은 이렇구나, 그분들이 한동대학생의 삶은 이렇구나 하고 서로 몰랐던 점을 알아가면서, 잘 몰라서 생겼던 불편한 감정들이 긍정적으로 바뀜으로서 서로에 대한 인식이 바뀔 수 있을 것 같아요. 잘 몰랐던 사람들과 만나는 기회가 조금 더 긴 시간 동안, 자주 일어난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포항에 특수학교들이 있잖아요. 한동의 학생들이 먼저 아웃리치해서,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어렵지만, 방학동안 캠프를 같이 해보는 것도 주도적으로 제안해보고 장애를 가진 학생들과 또 우리 한동의 학생들 사이에 우정을 만들어가는 시간을 가지면서 인식개선이 일어 날수 있을 꺼라 기대해요. 장애인 가족에게는 쉼의 시간을 줄 수 있기도 하고요. 여러분들 공동체로 함께하는 레크레이션 진짜 잘하잖아요 (웃음). 매주 수요일마다 단련된 실력? (웃음)』

4. 장애인 – 비장애인의 공존조건


막연하다. 적어도 한동 내에서의 비장애인에게 장애인은 함께 생활한다는 느낌조차 희미할 정도로 막연한 존재이다. 그러나 분명 장애인은 우리 가운데 실존한다. 어쩌면 앞서 함께 봤던 엘리베이터 앞 게시물의 존재는 비장애인의 장애에 대한 인식 수준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인식 개선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시작은 그런 문구를 바꿔보는 것이에요. 실제 그러한 메시지들이 우리가 같이 생활하고 있구나를 보여주거든요. 도서관에도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도구들, 확대경 같은 게 당연하죠. 사실. 근데 제일 잘 보이는 곳에 놓여있어요, 미국에서는. 그걸 볼 때, 같이 생활하고 있구나. 그걸 계속 우리가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거거든요. 더 나아가서는 실제 장애를 가지고 있는 학생들이 스피치를 하거나, 한동에서 생활하는 당사자의 목소리를 들어보는 것도 좋아요. 우리가 짐작하고 넘겨짚지 말고, 실제 학생들의 한동에서의 삶은 어떤지, 바라는 게 뭔지..』
이 교수의 말처럼, 가장 먼저 일상에서부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한다”라는 사실을 의식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 이 교수는 공존을 위해 학교 당국과 장애인, 그리고 비장애인이 해야 할 역할에 대해 논했다.

 

『장애인 학생을 입학 할수 있도록 환경을 준비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보다는 장애를 가진 학생들이 훨씬 많이 들어와야죠. 어쩌면 장애를 가진 학생들이 이 학교를 거부하고 있는 상황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미 베리어프리 환경 갖춘 학교, 내가 생각해도 학생들이 그런 학교 갈 것 같아요. 안 그래도 힘든데 적어도 대학 만큼은 편의시설이 잘 되어 있는 곳으로 갈 것 같거든요. 우리가 하나님의 대학이기도 하고, 좀 더 모두를 포용하는 학교가 되기 위해서 조금씩 환경을 바꾸어 가면서 장애를 가진 학생들을 웰컴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서, 장애를 가진 학생들이 우리 학교를 선택할 수 있을 만한 환경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장애를 가진) 학생이 (한동에서의) 필요를 제일 잘 알고 있으니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물어봐야 해요, 그리고 학교가 해줄 수 있는 것을 준비를 해야죠. (신문사에서도) 장애를 가진 학생들의 목소리. 그걸 들려주세요.』

(비장애인 학생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장애가 있든 없는, 어떤 장애를 가졌든지, 정도가 어떠하는지, 우린 다 ‘똑같은 하나님의 사람이다’라는 생각에서 변화는 시작될 수 있습니다. 공동체에 함께 있으면 행복하고, 배우는 게 즐겁고. 가끔은 (웃음), 이런 걸 똑같이 느끼는 학생이다. 여기서 출발하면 될 것 같아요. 내가 장애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다들 약점을 가지고 있잖아요? 우리는 정말 연약한 존재고, 언제든 부서질 수 있는 존재잖아요. 그렇기에 장애가 눈에 보이는 사람과 내가 다르다고 인식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교만한 것 같아요.

너무 어려운 말인데 사실은, 나도 실천이 어렵지만,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한 것이 아버지께 한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세상은 작은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크게 두지 않아요. 생산성도 없고, 뭔가 계속 도움을 바라기만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이 세대에, 적어도 우리는 지극히 작은 자들에 대한 관심을 갖고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여겼으면 좋겠다. 비단 장애인이든 아니든, 그랬으면 좋겠어요.』

 

장애는 개인이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장애가 극복의 대상이 되는 순간 장애는 개인 차원의 문제에 갇혀버린다. 어쩌면 문제는 장애를 가진 개인이 아니라, 장애인을 지극히 작은 자로 만들어버린 우리 사회가 아닐까?

관련기사

저작권자 © 한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