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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이들의 아름다운 연대
윤예은 기자  |  yoonye@hgu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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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5.01  23:3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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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옥상, 얇은 금속판으로 지은 건물을 향해 경찰이 끊임없이 물대포를 쏜다. 별안간 불길이 옥상에 있던 건물을 덮친다. 시뻘건 불이 순식간에 건물 안에 가득 차기 시작하고, 안에 있던 사람들이 건물 밖으로 하나둘 뛰어내린다. 2009년 1월 19일, 용산 철거에 반대하며 용산 지역 철거민과 다른 재개발 구역 철거민 연대 참여자는 망루에 올랐다. 망루 농성이 시작된 지 25시간 만에 경찰은 특공대를 투입해 강제 진압을 실시했다. 그 과정에서 망루에 화재가 발생했고, 철거민 다섯 명과 경찰 한 명이 죽었다. 검찰은 화재의 원인을 철거민이 던진 화염병으로 단정짓고, 망루 농성에 참가했던 24명을 기소했다. 재판부는 검찰의 공소사실을 대부분 받아들여 참사 당시 망루에 남아 있던 철거민 7명을 ‘공동정범’으로 보고 중형을 선고했다. 용산 참사가 발생하고 4년 후 2013년 1월 31일, 구속됐던 철거민들은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그리고 그때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되살리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용산 참사 이후 망가진 그들의 삶과 마음의 상처를 다큐멘터리 영화 <공동정범>이 기록했다.

달라서 아팠던 시간
<공동정범>에는 다섯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충연 씨는 용산 4구역 철거민대책위원장이다. 나머지 4명 천주석 씨, 김창수 씨, 지석준 씨, 김주환 씨는 용산 철거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다른 지역의 철거민이지만, 같은 처지에 놓인 용산 철거민을 돕기 위해 함께 망루에 올랐다. 다섯 명 모두 용산 참사 당시 망루에 있었지만, 이들은 모두 다른 아픔을 가지고 있다. 천주석 씨는 서울 상도4동 철거민이다. 용산 망루 농성에 연대로 참가했다. 교도소에서 나오자마자 집에 용역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용산 참사의 악몽이 채 가시기도 전에 집이 무너졌다. 천 씨는 무너진 마을을 보며 “교도소는 작은 감옥, 여기는 큰 감옥”이라고 말했다. 김창수 씨는 성남시 단대동 철거민으로 마찬가지로 연대 참가자다. 그가 교도소에 있는 동안 아내가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서울 순화동 철거민 지석준 씨는 용산 참사 당시 건물에서 뛰어내리면서 다리를 다쳤고, 이후 장애 4급 판정을 받았다. 또한, 참사 당시 자신이 탈출하도록 도와준 동지가 망루를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었다는 사실에 큰 죄책감을 느낀다. 서울 신계동 철거민 김주환 씨는 트라우마와 분노조절 장애 등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 매일 밤 술로 분을 삭여보지만 그때의 끔찍했던 기억은 잊히지 않는다. 이충연 씨는 주인공 중 유일하게 연대 참가자가 아닌 용산4구역 철거민이다. 그는 용산 참사로 아버지를 잃었다. 용산 4구역 철거민대책위원장으로서 용산 참사는 그에게 남다른 무게로 다가온다.
영화는 각 주인공의 다른 일상, 다른 모습, 다른 아픔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이들은 너무 다르다. 상처를 치유하는 방식도, 겪고 있는 아픔도, 처한 환경과 상황도 다 다르다. 보통과 같은 상황이었으면 서로의 다름을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그러기에 그들은 너무 아팠다. 참사로 인한 상처는 곁에 누가 있는지 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몸과 마음이 망가진 상황에서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은 방향을 찾지 못하고 가시처럼 서로를 찔러댔다. 가장 가까운 동지를 오해하고 불신했다. 다름은 좁혀지지 않고 갈등은 깊어졌다.

   
망루 농성에 참가했다가 다리를 다친 서울 순화동 철거민 지석준 씨.
   
용산 4구역 철거민대책위원장 이충연 씨는 용산 참사로 아버지를 잃었다.
   
서울 상도4동 철거민 천주석 씨는 용산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지만 망루 농성에 연대로 참여했다.
   
서울 신계동 철거민 김주환 씨는 용산 참사 이후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성남시 단대동 철거민 김창수 씨는 몇 시간만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망루에 올랐다가 공동정범으로 구속됐다.

같이 치유하다
뿔뿔이 흩어져 있던 그들이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출소하고 난 뒤 두 번째 좌담회 자리였다. 다섯 명의 주인공은 함께 모여 그때 끔찍했던 기억을 맞춰갔다. 서로의 조각난 마음과 기억을 하나둘 이어 붙이는 작업이 시작됐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들은 치유 받을 수 있었다. 이충연 씨는 자신의 부끄러운 기억을 꺼내어 놓고 동지들로부터 위로받고, 이해받을 수 있게 됐다. 지석준 씨는 자신이 망루를 탈출하도록 도와줬던 윤용현 씨, 이상수 씨가 결국 망루를 나오지 못하고 죽었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그러나 좌담회 자리에서 참사 당시 지석준 씨 옆에 있던 사람은 윤용현 씨나 이상수 씨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지석준 씨는 혼자 살아남았다는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을 공유하는 자리에서 가장 진실한 위로가 가능해졌다.
그들은 서로 다르지만 같았다. 모든 것이 서로 달랐지만, 그들은 모두 용산참사의 아픔을 가지고 있었다. 2009년 1월 20일, 그날 망루에 같이 있었다는 것. 같은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 그 기억이 서로를 다시 뭉치게 했다. 나는 너였고, 너는 나였다. 그들이 받은 상처와 아픔은 모두 달랐지만 결국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은 서로뿐이었다.

민망함도 있지만, 동지들이 어려웠죠. 불편했죠. 그렇다고 해도 나와 같은 그런 상황에 있었던 사람들은 이 사람들밖에 없기 때문에 이런 마음을 알 사람도 이 사람들밖에 없구나. 이렇게 생각이 들더라구요 –이충연, 서울 용산4구역 철거민대책위원장


억울함을 인정해준다고 그러면, 그 사람들이 나라가 인정해준다고 그러면, 이 화가 풀릴 것 같지만 사실 그 전에 인정할 수 있게 할 수 있는 것도 우리잖아요. 그런데 우리 자체가 이렇게 흩어져 있으니까. 사실 그것들을 다 줏어 담아서 하나가 돼야 나라가 인정하게 우리가 만들 수도 있고, 나라가 인정했을 때 우리가 같이 공동으로 ‘아 우리가 진상규명이 이렇게 이루어졌다’고 인정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우리가 다 흩어져있는 상황에서는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거거든. 확실한 거거든. –김창수, 성남시 단대동 철거민


영화의 말미에 다시 모인 다섯 명의 주인공은 일어서기 시작한다. 서로를 이해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분노가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그들은 분명히 알게 됐다. 용산 참사의 책임자였던 당시 김석기 서울청장에 대한 조사는 두번의 서면조사로 그쳤고,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당시 망루 농성에 참가했던 철거민 24명이 검찰에 의해 무더기로 기소된 것과 대조적이다. 용산 참사 진실규명은 아직 갈 길이 멀다. 아직 기본적인 화재의 원인 조차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경찰의 진압이 과잉 진압이었는지, 진압 과정에서 불법적인 요소는 없었는지도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다. 정부가 바뀌고 검찰에 대한 개혁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검찰 과거사조사위원회가 출범했다. 그리고 4월 2일 검찰 과거사조사위원회는 용사 참사를 재조사 대상을 선정했다. 용산 참사를 검찰이 반성하고 검토해야할 과거로 본 것이다. 용산 참사 진상규명을 위해 아직도 갈 길이 많이 남았다. 그러나 두 다리에 힘이 실리고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이유는 두 손 꼭 잡은 서로가 곁에 있기 때문이다.

사진출처 영화 <공동정범>

<공동정범> 김일란, 이혁상 감독과의 만남

<두개의 문>에 이어 김일란 감독, 이혁상 감독이 다시 손을 잡았다. <공동정범>에서 두 감독은 집요하리마치 주인공의 내면을 깊숙이 파고든다. 그들이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다큐멘터리 영화 <공동정범>을 연출한 김일란 감독.

Q <공동정범>을 만드는 과정이 힘들지는 않았는지

김일란 감독: 백남기 농민의 백도라지 님하고 관객과의 대화를 한 적이 있는데. 먼저 파일로 먼저 보내드렸다. 못 보시겠다고 하시는 거에요. 물대포 장면을 봐야 하는게 너무 곤혹스러워서 못 보겠다고 하더라고요. 유가족분들도 그렇고 주인공이신 신계위원장님도 그렇고 당사자들은 이게 영화로 보는 게 아니라 경험 그 자체고. 지옥을 경험했던 사람으로서, 생사의 갈림길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이 순간을 다시 떠올린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런데 한편으로 감독으로서의 고민은 이 분들이 느낀 공포와 두려움을 관객 분들이 그대로 느끼셔야 이게 또 영화잖아요. 영화의 역할에서 감독들은 주인공들의 감정을 전달해야 하는 것도 있으니까. 약간 모순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되나. 저희가 고민을 했던 것은 그날의 공포를 어떻게 하면 미학적으로, 예술적으로, 영화적으로 잘 전달할까 그런 고민을 하면서 영화의 여러가지 장치들을 다양하게 사용하는 걸로 고민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혁상 감독: 아무래도 다섯분이 참사의 트라우마도 깊게 느끼고 계시고, 심적 고통이 크신 분들이었기 때문에 사실 처음에는 이분들과 어떻게 마주할 수 있을까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관계를 풀어갈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것 같아요. 이 분들의 고통이 우리에게 전이되기도 했었고요. 이 힘든 것들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것을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라고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굉장히 기본적인 건데. 이것은 연대 활동가로서 약속이기도 하고. 그래서 고비들을 넘어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렇게 보면 되게 멋있어 보이고 잘 넘긴 것 같겠지만 사실 되게 괴롭기도 했어요.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했고 한 3, 4년 정도 걸렸어요. 주인공들의 심리적 변화들을 기다리고 있어야 되기도 했었고. 어떻게 보면 주인공들도 함께 시간을 견디면서 같이 싸웠던 게 아니었나라고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공동정범>을 연출한 이혁상 감독.

Q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꼭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부분이 있으신가요?
김: 피해자가 되기 전에 살았던 삶이 다양하잖아요. 다양한 삶을 살고 이었던 사람들이 피해자가 되는 순간 단일한 모습이 되는 게 아니라 각자의 삶을 산 만큼 다양한 피해자의 모습이 있을거고. 근데 우리는 피해자라고 하면 단일한 모습, 정형화된 모습만 상상하고, 그렇게 정형화된 모습으로만 피해자를 대해왔던 게 아닌가 자문을 해보자라는 의미에서 이 영화가 제작되었던 것이어서 그런 기획의도를 관객분들이 알아주셨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죠.

Q 피해자들이 받았던 ‘공동정범’이라는 판결도 그런 맥락에서 피해자를 단일화, 정형화 시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 그것은 국가뿐만 아니라 우리의 시선도 그런 것 같아요. 국가가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방식이 공동정범으로 묶었던 것처럼 사실은 우리 사회도 그들을 공동정범으로 단일한 시선으로 묶은 것에 대한 우리의 책임에 대한 것도 묻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죠.

사진제공 김일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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