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F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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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약 000라면?”이라는 질문은 한동 공동체 속 다양한 “우리”들을 조명하고,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한 도전이다. 한동의 다양성 회복을 위한 외침이다. 한동은 공동체라는 믿음 아래 던지는 질문이다.

“하나님의 대학”을 목적하는 한동대학교 안에는 교육과정에서부터 문화까지 기독교세계관이 닿아 있지 않은 곳이 없다. 이런 기독교 대학 한동대학교에서 비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떨까? 사실 이 질문은 아직까지 한동이 풀지 못한 아주 오래된 난제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귀를 여는 것이 우선이다. 아주 다른 세 명의 비기독교인의 목소리에 확성기를 대보았다.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전 한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확성기에 담아내지 못한 수많은 목소리가 산재한다는 것이다. 세 사람의 목소리를 진리로, 또는 그저 가벼운 불만으로 치부해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대안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학부생으로, 이제는 교목으로 오랜 시간 한동과 함께 해온 교목실 김완진 교목을 만나보았다. 그는 모두를 납득시킬 명쾌한 정답은 아니더라도, 케케묵은 이 문제를 풀어갈 실마리를 던져주었다. 


1. “혹시 비기세요?”

A : [첫 만남에 000가 “···혹시 비기세요?”. 라고 물었어. ‘비기가 뭐지?’ 잠깐 고민했는데, 웃으면서 다시 물어보더라. “아니요, 비기독교인이시냐고요.” ···]

“비기독교”라는 단어로 보는 한동 내 기독교 이외 집단의 입지

“비(非)기독교”, 줄여서 “비기”는 유독 한동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단어이다. 비기독교라는 표현은 대개 기독교 사회의 내부에서 외부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 “비기독교”는 근본적으로 기독교 내부에서 타 종교도나 종교가 없는 이를 지칭하는 기독교 중심의 표현인 셈이다. 

김완진 교목의 수업이나 설교를 들어보면 그가 “비기독교”라는 표현을 자제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이 “비기독교”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로 비기독교라는 표현이 비주류를 구분 짓는, 사회적 감수성이 떨어지는 표현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진 변현승 기자 byeonhs@hgupress.com

 

『사회적 감수성의 관점에서, 가능하면 주류가 아니라 비주류가 소외되지 않는 네이밍을 하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매년 한동대학교에 기독교인 입학비율이 최소한 85%에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91%까지 있어요. 그러면 기독교 외에 타 종교인이든지 혹은 기독교 외에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 특별한 종교적 신념이 없는 사람들이 9~10%에 해당하는 사람들일텐데, 이런 맥락에서 기독교와 비기독교를 나누는 네이밍은 주류문화와 비주류를 구분짓는, 사회적 감수성이 떨어지는 네이밍이라는 거에요.

 우리가 소수자면 괜찮아요. 우리가 소수자의 집단으로 주류 사회에 속해있다면 기독교와 비기독교를 나누는 것은 소수자가 그 속에서 응집력을 찾는 네이밍이 될 수 있겠지만, 사실 기독교인이 90%에 가까운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한동의 문화속에서 기독교와 비기독교라는 말을 쓰는게 막상 생각하기 시작하면 굉장히 불편한 네이밍이 될 수 있다는 감수성은 필요한 것 같아요.』

“비기독교”라는 표현의 편견 조장, 낙인효과 가능성

*1국립국어원의 연구에 따르면 특정 대상에 비(非)를 붙여 주류와 비주류를 구분하는 것은 표현이 사용되는 문맥상 요소, 사회적 맥락, 대상의 심리에 따라 차별 표현이 될 수 있다. “수도권/비수도권”, “강남/비강남” 등의 표현 그 자체로는 비하의 의미가 없으나, 문맥 상 지역 간 경제력 차이를 암시할 때에는 차별적인 표현이 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특정 사회에서 기독교인이 소수인 경우, 비기독교라는 표현을 통해 다수의 외집단을 지칭하는 상황은 차별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한동과 같이 기독교인이라는 내집단이 압도적 다수인 경우에 비(非)기독교라는 표현으로 외집단을 지칭하는 것은 외집단에게 주류문화로부터의 분리감과 고립감을 줄 수 있다.

“비기독교”라는 표현은 기독교인이 절대 다수인 한동 사회의 특성을 고려하면 아주 경제적인 표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피하게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이분법적으로 나눠야 하는 상황이 아닌 일상적 상황에서는 차별 또는 배제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비기독교라는 표현을 사용함에 신중해야 한다.

 

2. 종교교육, 비기독교인에게 벽이 아닌 계단으로.

 한동대학교의 졸업장을 받기 위해 이수해야 하는 기독교 과목은 2학점 3과목, 총 6학점이다. 여기에 더해 6학기 동안 채플을 이수해야 한다. 형식적 교육인 수업만 따져봐도 이렇다. 기독교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졸업을 위해 최소 3개의 신앙과목과 3년의 채플 이수가 필요한 셈이다. 기독교인에게 계단 한 블록이 비기독교인에게는 벽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한동대학교는 교육부(교육부장관)으로부터 정식으로 설립인가를 받은 종립 대학이다. 한동대학교처럼 교육부로부터 정식 설립인가를 받은 종립대학은*2(1) 학생의 명시적 동의가 존재한다면, (2) 교육 내용이 법령에 위배되거나 학교교육의 본질에 반하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없는 선에서 종교교육을 진행할 수 있다. 한동대학교의 경우 대학 지원 시 해당 내용이 모두 포함된 서약서를 제출하기 때문에 학생의 명시적 동의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2)의 경우 형사법상 처벌요건을 갖춘 내용을 교육하는 등 우리 사회의 상식적 수준에 어긋나는 경우를 의미하기 때문에 한동대학교가 종교교육을 하고, 신앙과목과 채플 이수를 졸업요건으로 요구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종립대학의 종교교육이 법적으로 보호받는 권리인만큼, 종교교육에 대한 개선 요구도 ‘대한민국의 교육이념에 입각하여 국가사회 및 기독교적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지성·인성·영성의 고등교육을 실시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본교의 건학이념을 준수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B : [힘들었던 거는 수업이 제일 컸던 것 같아요. 제 입장에서는 정말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죠. 들을 때 소설 듣는 것 같고, 암기만하고 시험치고 끝 이런게 많고…]

C : [“신앙과목은 어떻게 공부해?”) “모든 내용에 진심으로 하려면 전공보다 훨씬 열심히 해야 돼서… 음… 패스만 받으면 된다는 생각?”. ··· “창세기를 보는데, 난 진짜 무슨 소린지 1도 모르겠는데 진도는 막 나가고···”]

종교교육 중 형식적 교육인 수업은 학교에게도, 학생에게도 중요하다. 전자에게는 학교의 건학이념과 기독교 교육을 실현하는 차원에서, 후자에게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학문으로 접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비기독교인의 입장에 서서 종교교육의 형태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종교교육에 있어서 비기독교인을 배려하는 것은 비단 도의적인 결정일 뿐만 아니라 종교교육의 실효성 차원에서도 바람직하다.

『원래 전에는 크리스천 파운데이션1, 이게 지금 성경의 이해였고 CF2는 기독교의 이해였어요. 이렇게 둘 밖에 없었어요. 그때도 과목 두 개만 있는데 난이도 차이가 없다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그래서 CF1을 성경의 이해로 바꾸고, 이걸 3가지로 나눴어요. 학생들이 같은 성경의 이해지만 난이도에 따라 가장 기본만 들을 것인지, 어드벤스드를 들을 수 있게 구분을 했는데, 이게 체감이 안되는 것 같아요. 어쨌든 기독교가 처음인 학생들한테는 익숙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잖아요. 그래서 제안을 한다면, 기독교의 이해도 성경의 이해도 처음 듣는 과목은 너무 낯설겠지만, 종교를 억지로 받아들인다는 개념보다 새로운 세계관, 가치체계를 본다는 열린 마음으로 다가오면 어떨까… 그리고 세 가지 과목 중에 가장 기본만 들어보면 어떨까…』

김완진 교목의 말처럼 실제 한동대학교의 신앙② 영역은 각각 난이도에 따라 CF(Christian Foundation)1-A~C, CF(Christian Foundation)2-A~C 로 구분되어 있다. “기독교 신앙의 기초①” 영역에서는 “성경의 이해”, “기독교 신앙의 기초②” 영역에서는 “기독교의 이해”가 기본 과목인 셈이다. 다만 수강편람과 각 수업의 강의계획서에 각 수업 별 관계와 체계가 명확하게 적시되지 않아 각 수업의 강의계획서를 비교 분석하지 않는 이상 “신앙②” 영역의 각 수업이 난이도에 따라 나뉜 것임을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따라서 교육 개편의 실리를 챙기기 위해서는 보다 명확한 구분과 이에 대한 홍보가 필요하다.

『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일단 부담스럽죠. 학교에서 기독교 과목을 들어야 하고, 채플을 들어야 하고.. 스트레스일수 있다고 생각해요. 비기독교인들이 어려움을 겪는 것은 학교도, 교목실도 인식하고 있어요. 다만 막상 쉽지만은 않네요.』

 

3. 당신이 기독교 대학의 비기독교인이라면?

C : [한스트도 ‘모두가 기독교인이라는 생각으로 하는구나’ 라는 생각에 힘들었어. 오히려 한스트가 너무 힘드니까 그 다음 신앙 수업들이 힘들지 않더라.” ··· “불꺼지고 기도합시다 그러는데 난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고. 내 동기새내기에 비기가 나 혼자였으면 정말 힘들었을텐데, 그나마 동질감을 느끼는 친구들이 있어서 다행이었어. 근데 비기들간에는 커넥션도 없고, 있어도 학교입장에서는···]

한동의 수많은 문화가 가지라면 공동체는 뿌리다. 팀제도, Residential College(기숙형 대학) 등의 제도 뿐만 아니라 수많은 문화가 공동체 문화로부터 나온다. 한동대학교가 자랑하는 한스트(HanST) 역시 단순한 OT가 아니라, 타 대학과의 차별화된 공동체 문화의 시발점이라는 학생들의 인식이 지배적이다.

이는 기독교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한스트 뿐만 아니라 수많은 문화에서 소외될 가능성이 농후한 환경임을 의미한다. 한동대학교가 진정 기독교 공동체라면 한동대학교의 비전에 맞는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과 더불어 구성원의 다양성 존중이 요구된다. 

C : [···술마시는 (인스타그램)스토리 올렸는데, 팀사람이 ‘너는 우리 학교 대부분 사람들이 술을 안 마시는데 올리면 안 좋게 보는 사람이 있을거다. 안 올렸으면 좋겠다.’이런 얘기를···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고, 성인인데 술 마시는 것도 내 마음대로 못하나? 하는 생각에 안 그래도 힘들었는데 자퇴하고 싶기도 했고···]

인터뷰에서 언급한 사건과 비슷한 일들은 한동 내에서 심심찮게 일어난다. 물론 한동대학교는 한동 스탠다드 등을 통해 음주를 배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사적으로 이루어진 행위를 가타부타 하는 것은 자칫 정죄로 비추어질 수 있다. “남들은 다 그렇다.”, “남들이 보기에 불편할 것이다”라는 말은 아무리 선한 의도에서 발화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지적하고자 하는 행위가 위법성을 가졌거나 사회윤리적으로 명백히 문제가 있는 행위가 아닌 이상 그 자체로 설득력을 갖기는 어렵다.

한동 사회가 암묵적으로 가지는 “모두가 기독교인일 것”이라는 인식에 대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는 “기독교 대학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한동대학교가 기독교인만을 위한 대학이라는 것을 공표하지 않는 이상, 분명히 신앙이 없는 학생들도 한동대 공동체의 구성원이고 가족이라는 이해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기독교와 직접적 관계성이 낮은 동아리 또는 학회 선발 등의 영역까지 과연 신앙 여부가 준거로 개입되는 것이 합당한지 개인과 한동 사회 차원에서의 고민이 필요하다.

 

4. 기독교 대학 - “비기독교인”의 공존조건

기독교인 : 전도는 “우선” 입이 아닌 삶으로.

C : [내 생활에 간섭하지 않는 정도로 했으면 하는데, 기독교인 입장에서는 전도가 소명이라고 하니까 내가 할 말이 없더라. 진짜로 너무 신실하고 그런 사람들은 그게(전도) 소명이니까 저 사람은 평생동안 저렇게 생각했을 텐데 내가 ‘간섭하지 마세요’라고 말하기 어렵더라.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해결방안은 서로의 신념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것인데, 이게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가능한 것일까 싶다.]

B : [강요는 하지 않았고, 되게 조심스럽게 ‘나중에 너가 진짜로 좋은 계기가 생기면 믿었으면 좋겠다.’ 자기는 정말 ‘너가 좋은 쪽으로 믿었으면 좋겠다’ 라고 말한 게 가장 세게 말한거였어요. (그때 어떤 기분이 들었어요?) 좋지도 싫지도 않았어요. 사실 차별 그런 건 없지만, 공동체에 들어가면 비기독교인이라는 걸 밝히고 나서, 기독교인 입장에서 “괜찮아?”, “괜찮겠어?” 이런 느낌이 있어요. 저는 그게 오히려 더 약간 ‘어, 왜? 나는 괜찮은데’ 이런 느낌이었거든요.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배려하기 위해 물어보는 거지만, 그게 더 부담스럽고, 내가 다른가? 이런 느낌으로 보여지는 것 같았는데 오히려 편하게 얘기해줘서 고마웠어요.]

전도가 지극히 선한 의도에서 출발했다 해도, 받아들이는 상대에게는 불편할 수 있다. 기독교인에게 전도가 아주 중요한 사명이고 소명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접근방식에 변화를 주는 것은 어떨까? “전도”의 관점에서 본다 하더라도 전도 대상에게 신념을 강요하는 것은 분명 옳은 일이 아닐 뿐더러 효과적이지도 못하다. 이에 대해 김완진 교목은 스스로 비기독교인에게 종교권유, 전도의 차원을 넘어 신앙강요를 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볼 것을 제안했다.

『상대를 종교적 포교의 대상으로 보는 건 유쾌한 일은 아니에요. 상대를 종교적 포교의 대상으로 설정하면 잘해주는 것도 목적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으로 느껴지고… 전도가 중요한 것은 맞는데, 전도를 삶으로 보여줘야 하는 대표적인 곳이 한동대에요.…다수자이기 때문에 소수에 속하는 사람들을 포교의 대상으로 보고 접근하는 것 자체가 무례해요, 일단. 인격적이지가 않고. 현대 한국에서 전도라는 건 다 말로 하는게 됐어요. ‘예수 믿어라’, ‘교회 가자’, 그거 말고 전도를 몰라요. 이건 치명적인 문제에요. 지금 한국사회에서 개신교에 대한 대사회적 신뢰도가 바닥을 쳤거든요. 한목협, 최근에는 기윤실이라는 곳에서 한국교회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신뢰도를 조사해요. 이번이 최악이에요. 대한민국 국민의 절반 이상이 ‘나는 개신교도들을 신뢰하지 않는다’가 절반을 넘었어요. 열 명중에 다섯 명 이상은 개신교를 신뢰하지 않아요. 』

김완진 교목은 전도 이전에 기독교의 사회적 신뢰도를 회복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와 더불어 말로 하는 전도가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는 전도가 중요한 이유를 설명한다. 이미 기독교의 사회적 신뢰도가 바닥을 치는 상황에서, 말로 하는 전도에 앞서 삶의 태도와 방식으로 기독교의 가치를 알리고,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게 우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스피커의 신뢰도가 떨어지면 좋은 메시지라도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공존조건 : 공동체와 공동선

기독교인으로서 타인을 배려해야 한다는 명제에 동의한다면, 비기독교인으로서 한동대학교의 교육관에 동의를 보였다면 서로의 신념을 존중하고,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 “공존조건”은 공존을 위한 “최소한”의 요건이다.

공존조건을 마련하기 위해, “기독교의 황금률”을 원칙으로 하는 것은 어떨까?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태복음 7장 12절)라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대원칙으로 두는 것이다. 황금률은 기독교인-기독교인 관계 한정으로 적용되는 원칙이 아니다. 기독교인이 나와 다른 신념을 가진 이들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대원칙이다. 기사에서 언급한 문제들, 그리고 기사에 담지 못한 수많은 문제들 중 상당수는 황금률에 비추어 본다면 충분히 해결 가능한 문제들이다.

『공동체의 제일 중요한 가치는 개인이에요. 공동체의 핵심은 공동체에 속해 있는 개개인이 무시당하지 않고, 존중을 받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개개인이 공동의 목표와 공동선을 위해서 함께 존재하는 것이 공동체거든요. 신호등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공동체라고 하지 않아요. 자기 목적이 이루어지면 자기 길로 뿔뿔이 흩어질 사람이기 때문에. 공동체에 앞서 한 명 한 명  존중을 받고, 개개인의 인격과 개체성이 무시당하지도 않으면서 존중되어야 한다는 게 기본이어야 공동체적 담론이 형성되어가요. 건강한 개개인이 있어야 건강한 공동체가 만들어질 수 있는데, 개개인에 대한 존중이 가장 어려운 차원이죠. 』

공동체에 대한 그의 설명에 따르면 다수가 공유하는 정체성만이 독존하는 것은 공동체가 아니다. 소수의 “다름”이 그대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공동체이고, 공존조건은 이를 위한 최소값이다. 따라서 공존조건의 확보는 “선심”을 쓰는 것이 아닌 공동체로서, 동일한 인간으로서 마땅한 것이다. 공존조건의 확보를 위한 배려와 관용은 “우월감”이 아닌, “나도 타인일 수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사이에 우열은 없기에 해결방안은 오직 서로의 서로를 향한 배려와 관용이다. 김완진 교목은 공존조건에 더해 “한동대학교의 인재상과 교육의 목표”를 공동체 안에서 실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선 본질적인 질문을 계속해 나아가야 한다고 논한다.

▲사진 변현승 기자 byeonhs@hgupress.com
▲사진 변현승 기자 byeonhs@hgupress.com

 

『한동대학교가 어떤 인재를 키워서 배출하고 싶은지, 인재상이 무엇인지, 교육의 목적이 기독교인으로 만드는 것인지 묻고 싶어요. 다시 본질을 생각해볼 때가 된 것 같아요. 한동대의 교육적 목적은, 한동대라는 교육기관에서 한동이 제공하는 교육을 통해 한동이 만들고자 하는 인재가 되어서 졸업하고 나가는 것인데, 거기에 기독교인이 되어야만 그 인재상에 합당한 사람인가? 난 아니라고 생각해요. 무교로 와서 무교로 나가더라도 한동대가 기독교 대학으로 학문에, 삶에 담아 교육하는 가치가 그 학생에게 영향을 준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추구할 수 있는 공동선이 있어요. 예를 들어 아너코드. 기독교인이 아니면 정직하지 않은가? 교회 안 다니면 다 아너코드 안지키나? 기독교인이건 아니건, 우리 사회 구성원이면 누구나 정직의 가치를 알고 있고, 한 사람의 정직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가치는 종교를 떠나서 품을 수 있는 공동선일 수 있잖아요. 기독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한동의 인재상에 대한 공동의 목표를 향해서 공동선을 함께 존중하고 풀어나감으로,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기독교인으로 졸업하지 않아도 한동의 인재상을 가지고 나갈 수 있게 도와주는 곳이 대학이어야지, 기독교화를 시키는게 대학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봐요. 한동이 추구하는 가치들을 학생이 가지고 졸업하게 돕는다면 대학의 최소한의 역할은 끝낸 것이 아닌가?(웃음)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나가면 좋겠지만, 그건 2순위라고 생각해요. 기독교 대학은 개종기관이 아니라 기독교적 가치관을 토대로 교육하는 기관이에요.』

공존이다. 한쪽이 정체성을 잃어야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기독교인/비기독교인이기 전에 “한동” 공동체의 일원이며 한동의 과거이고, 현재이며, 미래이다. 공존조건은 어느 한쪽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래서도 안된다. 우리는 한 가족,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1사회적 의사소통 연구 : 지역·민족·인종에 대한 차별적 언어 표현 개선 연구 - 박재현, 이승희
*2사립학교에서 종교교육의 한계에 관한 법적 해석기준 – 조석훈

* 해당 인터뷰 안에서 기독교 이외 신앙을 가졌거나 종교적 신념이 없는 분들을 불가피하게 “비기독교”라는 단어로 지칭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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