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6년 병자호란은 당시 조선의 임금인 인조가 삼전도에서 머리를 박고 항복하며 끝이 났다. 하지만 패배로 인한 전쟁의 피해는 백성의 몫이었다. 그 중 조선 여성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는데 당시 청나라에 끌려간 조선 여성들은 무려 30만명이 넘었다. 이렇게 끌려간 여성들은 창기가 되거나 노예가 됐다. 아주 일부의 여성들만이 겨우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들이 바로 ‘환향녀’다.
 겨우 살아 돌아온 고향이지만 이들에 대한 당시 조선의 대우는 형편없었다. 환향녀들이 낳은 자식들까지 호로자식이라고 비하하고, 절개를 잃었다 하여 사대부들은 왕에게 이혼허락 상소까지 올릴 정도였다. 이후, 환향녀라는 단어는 몸가짐이 바르지 못한 여성들을 가리키는 말로 그 발음의 변화해, 화냥년이 됐다고 설이 전해진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은 단순히 조선시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사례는 아니다. 21세기, 현재를 살아가는 대한민국에도 똑같은 피해자들이 있다. 바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다.
 19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가 국내 거주자로는 최초로 일제강점기 위안부 피해자였음을 증언했다. 당시 사람들은 위안부라는 끔직한 조직적 강간의 사실이 있었다는 것에도 충격을 받았지만, 그 비밀이 50년간 지켜졌음에 더욱 놀랐다. 청나라에 끌려간 조선시대 여성들처럼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경우도 빈번했고, 돌아왔다 하더라도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조차 피해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수많은 피해자들이 자신의 피해사실을 ‘정절’을 잃은 치욕의 문제로 치부했고, 당시 사회의 눈초리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50년간 ‘침묵’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같은 강요된 침묵 속에 한국 사회 역시 공범이었음을 부인 할 수 없다. 작년 12월 28일, 한국과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합의문을 발표했다. 한일 합의 직후 아베 신조 총리는 “우리의 아이나 손자, 그리고 그 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 사죄를 계속해야 한다는 숙명을 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라며 “더 사죄도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이는 피해의 당사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을 배제한 합의였다고 볼 수 있다. 5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위안부 피해자에게 사회는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소녀상은 여전히 일본 대사관 앞에 있다. 지난 시절, 침묵을 강요당했던 위안부 할머니들처럼 말 없이 침묵하고 있다. 그저 그곳에 앉아 주먹 쥔 손을 무릎에 올린 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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