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되는 한동생활

이제 새로운 학기가 시작된다. 여느 때처럼 준비하는 마음으로 짐을 정리하고, 청소를 했다.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면서 전공수업,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 새로 만날 선배님들 생각에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게 된다.
내가 이런 설레임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한동대학교의 팀 제도 때문인 것 같다. 다른 학교 친구들의 말을 들어보면 짜여진 시간표, 같은 교실, 같은 전공 친구들은 똑같을 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팀 제도를 통해서 같은 전공은 아니어도 신입생과 직접 대면하고 그들을 품고, 고학번 선배님과도 교류할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팀 모임 시간에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같은 방을 쓰기 때문에 더 중요한 사람들이다.
만남이 잦은 만큼 팀에서 겪게 되는 것은 인간관계의 어려움인 것 같다. 서로 다른 모양을 가진 사람들이 같은 방을 쓰기에 부딪히기도 하고, 어려워하고, 속상한 일도 생기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어떻게 하면 지혜롭게 해나갈 수 있을까 고민하고, 지인을 찾아가 상담하게 된다. 간사님께서는 사람들과의 다툼, 상처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처럼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힘든 경험들을 통해서 학생들이 리더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다고 하셨다.
한동에서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고 양보하고, 용서 하고 때로는 분노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팀 사람들과 어울림을 통해 서로의 차이점을 받아들이면서 나와는 성격과 취향이 틀리다면서 무조건 비판하는 것을 고치고 그들의 다양성을 배우게 된다.
팀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잘못이라고 탓하게 되는 습관이 있었는데 생각해보면 그것은 나의 무관심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었다.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잠12:18)” 아담과 하와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서로를 탓했던 것처럼 나 또한 내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남의 탓으로 돌려서 상대방을 힘들게 한 것이다.
좁은 공간에서 같이 살다 보니 그 사람을 만나보지 않고 소문으로만 판단해서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갈등을 겪게 되면 머리가 아닌 감정으로 상대방을 대하게 되는데 이것이 공동체에 큰 타격을 주는 것이다. 이때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상대방에게 나의 속마음을 말하는 것은 큰 도움이 된다. 또한 방순이, 방돌이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경청하는 자세를 배울 수 있다. 나는 상대방보다 더 많이 얘기하고 상대방은 들어주는 편이었지만 경청은 상대방을 이해하게 되고, 공감하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2006년도 채플시간 졸업생 선배님께서 한동에서 꼭 얻어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최고로 만들고, 귀한 동역자를 만나라는 것이었다. 한동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경험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그 이유는 첫시간과 끝시간, 기도실, 기숙사, 팀 제도를 통해서 마태복음 22장에 나온 계명, 주를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현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새 학기를 시작하면서 기대해본다. 한동의 아름다운 사람들의 섬김의 자세와 아껴주는 마음이 계속 이어질 것을... 한동에 모인 ‘하나님의 도를 따르는 사람들’과 같이 다시 한 학기를 보내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장한별 (상담사회 06)

믿음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저는 ‘고할’ 것이 없습니다. 믿음이란 것을 알게 된지 2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라도 고해라’라고 멱살을 잡힌다면 딱 하나 말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알 길이 없으나, 제 눈에 보이는 이 ‘믿음’이라는 것은 생각을 하면 할수록 너무나 큰 것이기 때문입니다. 네, 정말로 큰 것입니다.
제가 ‘믿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라’고 부탁 드리는 이유는, 그 믿음이란 것이 마치 숨을 쉬듯 자연스레 얻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란 것의 전제가 너무나도 크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서있는 이 땅의 논리와 너무나 다르기도 합니다. 단순히 다른 정도가 아니라 정반대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그 두 가지 정반대의 것, 세상과 믿음,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좇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지식을 쌓고 쌓아 진리로 올라갈 수 있다고 하나, 성경은 진리는 이미 내려와 있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온통 보이는 것을 추구하나, 성경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같이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얘기합니다. 세상은 온통 자기에 대한 사랑뿐이지만, 성경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안락을 추구하지만, 성경은 고난에 동참하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살려고 발버둥 치지만, 성경은 죽으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지금 서있는 이 땅’이 전부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지금 서 있는 이 땅은 불로써 심판 받을 땅이며 다가올 천국을 준비하고 기뻐하라’라고 말합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던 세례 요한의 첫마디도 ‘천국’’이었고 성경의 끝 구절도 ‘천국’입니다(마3:2, 계22:20). 예수 그리스도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선포 하신 것도 하나님의 나라였고, 예수님의 제자들과 바울 사도가 산채로 피부가 벗겨져 죽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고, 창에 맞아 죽고, 돌에 맞아 죽고, 목 베여 죽기 직전까지 부르짖던 것도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가진 이 ‘믿음’이라는 것은 바울 선생의 말대로 세상이 보기에는 그보다 더 미련한 일이 없다 할 그러한 것입니다(고전1:23). 그러한 것이 믿음이라면, 그 믿음이란 것이 얼마나 큰 것이요, 그것의 전제조건이 얼마나 큰 것인지 응당 다시 한번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요?
믿음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말로 큰 것입니다. 그것의 전제조건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입니다. 그 전제조건들 중에 하나가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빌라도는 영광스러운 보좌에서 화려했고, 그 앞에 서신 예수님은 밤새껏 시달리어 지치고 초라했습니다. 우리가 선택한 분은 영광스러운 세상의 빌라도가 아니라 초라하신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믿는 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영광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주와 주의 나라를 택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교인이 70만이요 세상에서 제일 큰 교회임을 자랑하고, 기독교 인구가 전체인구의 1/4임에 어깨에 힘을 주고, 세상의 높은 권세와 명예, 많은 돈을 갖는 것이 축복이라 말하지만, 성경 전체 어디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부와 명예, 권세를 축복한 예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 부와 명예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경고는 단순히 주의하라는 수준이 아니라 간곡한 울부짖음입니다. ‘보이는 것’으론 ‘보이지 않는 것’을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지독한 현세주의자가 내세를 꿈꿀 수 없습니다. ‘보이는 것’을 좇으며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라고 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의 학생회장이 한동대학교 출신이라는 점을 개인적으로 축하할 수는 있으나 그것을 세상 기준으로 자랑스러워 하는 것은 결국 ‘보이는 것’을 좇는 것일 뿐입니다. 부풀려진 취업률을 세상을 의식하여 자랑한다면, 그 역시 ‘보이는 것’을 좇을 뿐입니다. 누리사업으로 몇 십억의 돈을 지원받았음을 감사하고 기뻐할 수는 있으나 그것을 세상 기준으로 빗대어 어깨에 힘을 주게 된다면, 그 역시 ‘보이는 것’을 좇는 것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권세를 자랑하며 어깨에 힘을 주러 이 땅에 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와 가장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죽음을 맞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드는 ‘보험’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얻은 우리의 구원은 1년에 70만원 내는 자동차 보험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진실로 믿는 다면, 우리는 낮아져야 합니다. 세상에서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지극히 낮아져야 합니다. 낮아지고 낮아져서 마치 없는 듯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소금의 비유를 기억하길 바랍니다. 소금은 짠맛을 냅니다. 음식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기억하십시오. 소금이 짠맛을 내려면 물에 녹아야 한다는 사실을. 물에 녹아 눈에 보이지 않아야만 짠맛을 내는 진정한 소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한승훈 학우 (국제어문 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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