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잔이 주어졌다. 투명한 글라스 안에 맑은 빛 액체가 서서히 차오른다. 언뜻 보면 무채색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보니 희미한 연두 빛이 일렁인다. 서서히 입술을 잔 끝에 갖다 댔다. 코끝을 톡 쏘는 강한 향에 입술을 잠깐 떼었다. 맴도는 잔향을 무시한 채, 반 모금을 머금었다. 그리곤 앞에 앉아 있는 분이 설명 해준 대로, 마치 가글하듯 혀를 굴렸다.
확 밀려들어오는 신 맛, 그 속에 쓴 맛이 섞여 있다. 부드럽고 달콤한 맛을 기대했는데, 적잖이 실망했다. 들어오던 ‘와인의 맛’과는 조금 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 모금’으로 전체를 판단하는 누를 범하지 않기로 했다. 투명한 글라스를 적당한 속력, 일정한 방향으로 빙빙 돌렸다. 그렇게 돌리다 보면, 와인 맛이 변한다고 했다.
은은하게 빛나는 조명 속에서 감미로운 재즈를 들으며 잔잔하게 소용돌이치는 와인을 보고 있으니, 문득 일상의 일들이 가볍게 머리 속을 스친다. 와인은 그 자체보다 ‘분위기를 마신다’라는 말이 서서히 공감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 돌렸다’라고 느낄 즈음 두 번째 잔을 머금었다. 첫 잔의 맛이 덜하긴 했지만, 기대했던 맛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세련된 분위기에 젖었기 때문인지, 아까와 같은 실망감은 없었다.
둘리 님과 담소를 나누는 도중, 세 번째 잔을 머금었다. ‘음?’ 목젖을 넘기면서, 입 안에는 낯선 맛이 감돌았다. 약간 시큼하면서 단맛이 느껴진다. 취해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잔에 남아 있는 다량의 와인은 고맙게도 ‘너 아직 한 잔도 안 먹었다’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줬다.
와인을 마시는 것에 조금씩 재미를 느꼈다. 앞에 분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하며 와인을 돌리고 또 돌리다가 다시 입 안에 머금었다. 조금 신 듯 하지만, 부드러운 맛이 확 와 닿는다. 맛있다.
달라진 맛을 설명하는 내 말에, 둘리 님은 지금의 내가 ‘눈이 열리는 중’이라고 답했다. 풀어 말해, 이 말은 ‘그 와인의 맛이 느껴지는 상태’라고 한다. 한잔도 채 비우지 않았는데 변하는 이 녀석, 참 재미있다.
경솔하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이 녀석은 신기하게도 ‘술’ 자체보다 분위기에 취하는 맛이 있다. 알코올 더미에 몸이 흠뻑 젖는 기존의 ‘술’과는 확실히 다른 듯 하다. 더불어 이 녀석은 안주마저도 감질 맛이 나게 한다. 아마 와인을 음미하는 습관이 안주를 먹을 때도 붙었나 보다.
분위기 좋은 바, 은은한 조명, 잔마다 각기 다른 맛을 내는 와인, 맛깔스런 음식 그리고 잔잔한 음악.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모든 것을 온전한 정신으로 느낄 수 있다는 점이 하이라이트. 누군가와 함께라면 이야기를 나누기 좋고, 혼자라면 생각을 정리하거나 여유를 찾기에 좋을 듯 하다.
마지막 잔을 입안에 머금었다. ‘엑?’ 갑자기 쓰고 텁텁한 맛이 입안에 가득히 찬다. “와인이 그 맛을 다했나 보네요.” 둘리 님이 말씀하셨다. 그 맛을 다하는 순간까지 이 녀석은 맛을 바꿨다. 마지막까지 내게 ‘맛이 변하는’ 즐거움을 안기고 가버렸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그렇게 와인 바에서의 하루가 지나갔다. 돌아오는 길목에서, 와인이란 녀석에게 받았던 느낌을 다시 한 번 더듬어 봤다.
와인. 이 역시 ‘술’이긴 하지만 무엇인가 다른 목적을 가지게 할 수 있는 술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술’을 먹는다는 생각보다 새로운 문화를 체험해본다는 느낌을 가지고 이 녀석을 접했다. ‘취함’을 목적으로 먹는 공통점을 가졌다. 와인도 우리를 취하게 만들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취함’은 달콤한 분위기에 젖어 음악에 몸을 맡긴 채, 잔 마다 달라지는 맛을 음미하며 ‘분위기에 취하는 것’이다. 여느 술처럼 억지스레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쓰디쓴 액체를 목젖에 벌컥벌컥 들이부을 필요가 없었다. 자연스레 입 안에 천천히 머금다 부드럽게 ‘꼴깍’ 삼키면 그걸로 끝이었다. 사람을 벌거벗은 짐승으로 변화시키는, 맥주나 소주와 같은 술이 지닌 ‘취함’이 아니었다.

김용주 기자 endless2zi.hgu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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