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전 손택은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던 2003년, <타인의 고통>을 세상에 내놨다. 손택은 이미지 과잉의 시대에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묻는다. 기술의 발달로 우리는 수많은 이미지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손택에 따르면 이미지 과잉의 시대에 타인의 고통은 일종의 ‘스펙터클’로 소비되어 버린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시간도 없이 밀려드는 이미지에 휩쓸린다.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타인의 고통은 구경거리로 전락하고 만다. 우리는 TV를 보며 잠시 슬퍼하다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중간고사를 준비한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바라볼 때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선 우리는 직면해야 한다. 우리는 얼마든지 타인의 고통을 피해 도망칠 수 있다. 스마트폰은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면 우리를 불편한 장면에서 아이돌의 무대로 데려가 준다. 금세 마음이 한없이 가벼워지고, 타인의 고통은 다시 뒷전으로 밀려난다. 그러나 우리가 눈을 돌린다고 해서 타인의 고통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괴로워도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한다. 폭력에 의해 인간의 생명이 어디까지 유린당해 왔는지 눈으로 보고 아파해야 한다. 손택의 말처럼 사람이라면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지하고, 세상만사를 잊을 만큼 순수하고 천박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그리고 기억해야 한다. 손택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억은 이미 죽은 사람들과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가슴 시리고도 유일한 관계다. 기억은 남아 있는 사람이 떠난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다. 우리는 그들을 숫자로 뭉뚱그려 기억해서는 안 된다. 세월호 사건을 304명이 죽은 사건으로 기억하는 것은 모든 것을 합리화, 수치화할 수 있다고 여기는 근대의 습성이다. 세월호 사건은 하나의 생명과 가능성이 사라진 사건이 304번 일어난 것이다. 제주 4·3도 마찬가지다. 2만여 명이라는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2만 번이 넘도록 누군가의 아버지, 어머니, 아들과 딸이 이념에 희생됐다는 것이 중요하다. 70년 동안 2만 번이 넘는 슬픔이 반복된 것이다. 우리는 숫자가 아닌, 그들의 이름과 얼굴을, 그때의 풍경을, 그 분노와 슬픔을 기억해야 한다.
세 번째가 가장 어렵다. 우리는 연민을 넘어 양심으로 가야 한다. 대부분 감정이 그렇듯, 연민은 변하기 쉬운 감정이다. 연민의 감정을 느낄 때 우리는 무력감을 느끼는 동시에 무고함을 인정받는다.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자신은 이 사건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면죄부가 연민의 감정에서 나온다. 타인의 고통에 가 닿기 위해서는 단순히 연민의 감정에 그쳐서는 안 된다. 연민의 유혹을 이기고 양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내가 누리는 특권이 타인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양심의 고백이 필요하다. 손택은 말한다.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학보사를 하다 보면 나중에 기자를 할 거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나는 그때마다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아서”라고 말끝을 흐린다. 내가 바라는 행복은 손택이 지적한 이기심과 천박함의 발로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살겠다는 말이다. 잔인한 4월에 내가 바라는 행복은 얼마나 얄팍한 것인가. 나는 직면하기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아빠는 20년이 넘도록 헬기를 조종하셨다. 군 생활을 하시며 아빠는 동료를 잃었다. 엄마는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고 했다. “그냥 미안해서… 도저히 얼굴을 못 보겠더라.” 엄마도 타인의 고통 앞에서 자신의 행복이 부끄러웠던 걸까.
연민을 넘어 양심에까지 이른 사람들은 어디 있을까. 그들은 광장에 있다. 광장에 나가 천막을 치고, 서명을 받고, 노래를 부르다가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하나같이 말한다. 미안하다고. 나는 내 행복과 이익을 끌어안고 밀실에 있다. 연민의 감정으로 자위하며 밀실에 앉아 광장을 바라본다. 꽃이 지기 전에 밀실에서 나와 광장으로 나가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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