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 요즘 글을 쓸 때는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기 때문에 노트북의 무게가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상징적으로 펜을 든다고 하겠다. 펜의 종류도 다양하지만, 그중 기사를 쓰는 펜을 든 지 두 학기 째를 보내고 있다. 기사를 쓰면 쓸수록, 시간이 가면 갈수록 펜이 무겁다는 생각이 든다. 여느 학생처럼 1교시에 가서 수업을 들어도 취재와 관련된 연락이 올 때가 있다. 교직원을 만날 때도 기자로서 만나는 것은 학생으로서 만나는 것과 다르다. 기자라고 스스로 생각하면 취재윤리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취재윤리는 ‘중립을 지켜야 한다, 취재원을 보호해야 한다, 공정한 사실만을 보도해야 한다’는 말로 기자를 제한한다. 마치 이 글자들은 기자로서 책임을 지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기사를 정정하는 ‘바로잡습니다’는 기자에게 있어서 아픈 부분이다.
취재 윤리가 엄격한 이유는 기사가 팩트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팩트란 전체적인 내용의 핵심이나 분명한 사실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진다. 기사는 충분한 취재와 피드백을 바탕으로 의문을 품지 않고 받아들이는 정보로 신뢰받는다. 기사를 쓰다 보면 진정한 팩트는 있을까 하는 고민이 든다. 실제 일어난 사실에도 여러가지 해석이 있기 때문이다. 기존 본지의 ‘장기자랑 계속해도 괜찮니’ 기사는 장기자랑의 강압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춘 기사다. 하지만, 장기자랑을 좋은 문화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설문조사 결과 장기자랑이 불편했던 학생이 있음은 사실이지만, 기사를 쓸 때는 기자의 주관이 들어간다. 이 주제에서 내용의 핵심을 기자가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자가 스스로 주관을 바로 잡는 것이 중요하고 어렵다. 주관을 잡기 위해 토론을 하며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지만, 나의 생각을 계속해서 비판 받는 것은 지치는 일이다.
결국, 기자가 되는 것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과 비슷하다. 기자가 되기 전에는 문제가 있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 궁금해 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러나, 기자가 되면 학생부터 교직원의 문제를 샅샅이 파헤치는 달갑지 않은 일이 생긴다. 기자가 되는 것은 온갖 불행을 가두어 둔 상자를 여는 판도라의 심정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나의 불행도 여기서부터 시작된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신문사를 시작하기 전부터 기사를 쓴다는 것은 온갖 사건에 대해 알고 그것을 전하는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기자가 된 이유는 호기심도 있지만, 누군가는 짊어져야 할 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짊어지지 않으면 누군가는 더 불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판도라의 상자라는 신화에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있다. 판도라의 상자에는 조금의 희망도 들어 있어 사람들이 계속 살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결과로 삶이 고단하고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 그러나, 마음속 한 켠에는 기사를 통해 조금은 바람직한 사회가 될 것이라는 작은 희망이 계속할 힘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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