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3학년이 된 A는 나름대로 ‘사회생활’에 익숙해진 것 같았다. 한동대 내 수많은 관계, 동기와의 관계, 선배와의 관계, 그리고 교수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와 태도를 마침내 파악한 그였다. 그는 이제 “네가 아직 뭘 몰라서 그래”라는 말도, “넌 너무 예민하게 굴어”라는 말도 듣지 않았다.
‘교수와 학생 사이가 다른 대학교보다 좀 더 특별하다는 한동대.’ 지난해, 딱 이맘때쯤 발행한 한동신문 229호의 커버스토리 첫 번째 문장이다. 스승의 날이 이삼일 지난 건 그때와 비슷한데, 이번에는 따뜻하고 예쁜 글 대신 건조무미한 보도 기사를 내놓았다. 요지는 “마음대로 강의계획서 바꿔도 돼?”
객관적 사실 여하는 확인할 수 없어도, 대체로 한동대에서 교수는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다. ‘교수님 너무 좋다’는 행복한 고백이 여기저기 심심찮게 들린다. 활짝 열린 오피스, 진로•연애 등 온갖 종류의 상담을 마다치 않는 교수, 자상한 보살핌까지. ‘특별한 관계’는 아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리라.
의문이 드는 것은 ‘어느 순간’이다. 따듯하기 그지없던 관계는 어느 순간 갑을관계가 된다. 스승에서 서비스 제공자로 변신은 한순간이다. 학기 중간 ‘통보’되는 일방적 강의계획서 변경은 한 예다. 강의실 안 대등한 주체로서 학생의 선택과 그에 따른 책임은 이 하나로 금세 허무해진다. 물론 학생이라고 가만히 있으란 법은 없다. 그러나 더 얄궂은 현실은 “내 권리는?” 한마디조차 꺼내기 거북한 상황이다.
개개인의 선택과 사정은 뒤로하고, 소심한 학생이나 권위적인 교수에 이 권리 보장의 책무를 넘길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구조다. 권리가 충분히 보장되는 시스템 말이다. 학생의 호기에 권리가 오가는 건 그 구조가 아니다. ‘교수의 수업권’ 또는 그때그때 교수의 관용에 속 편히 기대기에는 사정 많은 학생이 수없다.
교수의 재량을 못 인정하는 것으로 들릴까. 아니면 스승의 은혜라곤 다 잊은, 정 없는 주문일까. 그러나 어쩌면 그건 너무 오래 권리가 잊힌 탓이다. 당연히 요구할 수 있으니까 권리다. 그러면서도 권리는 익숙함과 예민함 중 후자에 기운다. 권리에 대한 요구는 따뜻하지 않을 수 있다. 그다지 예쁜 모양도 아닐 것이다. 자연스레 자리하던 관계에서 벗어나, 어떻게 상대의 표정이 변할지도 모르는 영역에 들어가는 일이다. 다분히 의지적인 이 요청은 ‘민원이 들어와야 안다’는 답변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행여 이 예민함이 그저 ‘더 잘해달라’는 징징거림으로 보일까 두렵다. 아니다. 오히려 이건 애써 던지는 질문에 가깝다. “학생은, 권리는 그래서 어디 있는가?” 묻는, 한동대 교수와 학생 사이 특별한 관계에 따지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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