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대 진입로의 “Why Not Change The World”라는 슬로건은 보는 이의 심장을 뛰게 하는 역동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요구로 다가올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 추상적이고 막연하여 비현실적으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개교 11년, 또 다른 도약을 준비하는 지금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자.
‘세상 바꾸기’라는 표현은 비록 널리 사용되지 않지만, 이미 많은 조직과 개인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가 되어 있다. 기업은 보유하고 있는 자원을 이용해 상품, 서비스, 문화 등을 생산하고 그것을 재화와 교환함으로써 수익을 얻는다. 여기서 가치란 그 상품이나 서비스 등을 구입한 경우와 그렇지 않았을 경우의 차이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고객은 기업이 만들어내는 차이, 즉 변화에 가격을 지불하는 것이다. 결국 고객들에게 의미 있는 변화를 제공할 수 있는 기업은 성장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기업은 재화와 교환할 가치가 없으므로 생존하기 어렵다. 결국 ‘세상 바꾸기’는 이미 모든 사람과 조직이 공통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목표이다. 단지 누가, 왜, 어떻게 바꾸려 하는가가 사람이나 조직마다 다르고 그것이 그들의 정체성을 결정할 뿐이다. 그렇다면 한동대에서 말하는 ‘세상 바꾸기’는 어떠한 점에서 특별한가?
먼저 세상을 바꾸려는 동기와 목적이 다르다. 세상에서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바꾸려 노력한다. 그러나, 우리의 세상 바꾸기는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세상은 고객을 수익의 통로로 바라보나, 우리는 그들을 통해 얻는 이익보다 가치를 제공함으로써 섬기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세상을 바꾸는 주체는 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에굽에서 이끌어 내신 분께서 모세가 아닌 하나님이신 것처럼, 오늘날 세상을 바꾸시는 분 역시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사도행전 2:17에 비전이란 성령께서 임하셨을 때 보게 되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비전은 각자 스스로 설정하는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발견되는 자신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을 바꾸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과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 바와 같은 겸손하고 충성된 청지기의 모습(눅 12:42, 빌 2:5)일 것이다.
셋째, 세상의 방법과 다른 하나님의 방법에 의해 세상을 바꾼다는 점이다. 마태복음 5장에서는 소금과 빛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소금이란 맛을 내는 존재, 즉 being를 상징하며, 빛이란 보다 적극적인 행동, doing을 상징한다. 예수님께서 빛에 앞서서 소금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은 먼저 각자의 위치에서 맛을 낼 수 있는 존재가 되라는 말씀일 것이다. 각자의 작은 충성을 통해서 주님의 뜻이 시작될 수 있으며, 작은 일에 충성된 자들이야 말로 빛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생각한다. 세상을 바꾸는 것이 모세나 엘리야처럼 크고 놀랍게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믿음의 그루터기(사6:13)나 엘리야 시대의 남은 자 칠천 명(왕상 19:18)으로부터 시작될 수도 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이 세상을 바꾸기에는 너무 작아 보일지라도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는(고전 1:27)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 바꾸기’의 위력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의 계획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놀랍게 성취되어 왔으며, 그로 인해 어둠 속에 빛이, 절망 속에 소망이, 갇힌 자에게 자유가 전파되었다. 그 결과는 언제나 세상을 살리는 변화를 가져왔다. 이와 같이 ‘세상 바꾸기’란 우리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생명의 소망이다. 우리를 통해 이루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위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열정이 우리 안에 충만하기를 바란다.

김인중 교수 (전산전자공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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