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대기로 보이는 나무만 있던 황량한 한동에 삼십대 초반에 와서, 아름드리 벚꽃이 날리는 멋진 캠퍼스로 변모해 가는 동안 이곳에서 지천명을 넘겼다. 나도 학생도 학교도 많이 변했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변함이 없으셔서 참 감사하다. 지난 20여 년을 돌이켜보면 떠오르는 일들이 많다. 학교에 와서 강의 준비하고 적응하면서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았던 때, 이제 제대로 강의도 하고 눈치도 생겨서 살짝 교만한 마음으로 지냈던 때, 이제 어느새 젊은 혈기가 사라질 수밖에 없는 나이가 되어, 힘들어 숨어버리고 싶을 때 넘어지지 않도록 힘을 부어준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지나간 세월을 돌아보면 사소한 일 때문에 속상해서 힘이 빠지거나, 인간관계 때문에 마음이 많이 상했거나, 몸과 마음이 점점 침체되어가고 있을 때, 나에게 사랑과 관심 위로를 준 존재는 제자들이었다. 먹을 것이 있으면 나를 기억하고 가지고 오는 제자들 - 엄마가 담은 갓김치 한 박스를 가져와서 맛있다고 했더니 흐뭇한 표정 짓던 얼굴이 떠오르고, 멀리서 보고서도 소리쳐 부르면서 반갑게 인사해 주는 제자들의 표정이 눈에 선하고, 뛰어와서는 자신의 손에 들고 있던 음료수 건네면서 같이 먹자고 하던 손길이 느껴진다.
힘들 때 찾아온 제자들은 나의 존재감을 일깨워 주기도 했다 – 새내기 첫 학기 수업을 수강하고는 전산전공하기로 정했다고 감사하다던 여학생은 작년에 대학원에 진학하여 논문발표도 잘 해 내고, 연구실 앞을 지나가다가 보고 싶다고 잠깐 들어와서는 올 때마다 교수님 연구실에 간식이 많아서 너무 좋아요 라는 말에, 나는 중독되어 출근하면서 손에 가득 간식 들고 온다. 뭔가 먹으면 감동을 표시하는 리액션의 탑원은 지금은 취직해서 만날 때마다 맛있는 밥을 대접해 준다. 3년 동안 힘들게 취업 준비해서 몇 달 전에 합격한 제자가 이제 4월부터 인턴이 끝나고 정식으로 월급을 받으니 자기가 아는 가장 좋은 곳에서 교수님 밥 사드리고 싶으니까 꼭 서울에 와주세요 라고 해서 울컥했다.
신기하게도 힘들고 불평하게 만들었던 제자들에 대한 기억은 잊혀져서 참 감사하다. 20년이나 선생을 하면서도 잘 모르고 있던 한 가지를 작년 학부모수련회에 참석하신 어머님 한분이 깨우쳐 주셨다. “지금은 철이 없어 보이고, 교수님들 애 먹이는 제자들도 앞으로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될 날, 그들의 모습을 기대해 주세요” 하시는데 마치 내 마음 깊은 곳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 같았다. 그런 마음으로 지지하는 부모와 선생이 제자들을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가는 힘인데, 그것도 모르고 오랫동안 내 자신이 좋은 선생이라고 착각하고 살아온 것이다.
지금까지 마음속에 남아서 새겨진 제자들 중에서 가장 기억나는 제자가 한 명 있다. 한동에 와서 두 번째 맞은 스승의 날이었다. 팀 학생 중 부모님 없이 동생과 생활하는 형편이 어려운 여학생이 레모나 10개 담긴 작은 박스와 감사카드를 들고 와서, 더 좋은 것 사 드리고 싶었은데... 해서 같이 눈물 글썽이며 마주 보았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한동에서의 역할이 맡겨진 수업과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을 나누고 격려하는 것이구나 싶었다. 그 후로도 여러 제자들의 마음이 담긴 더 고가의 선물을 받았었지만 그때의 레모나를 능가하기는 어렵다. 아직도 레모나를 볼 때마다 그 여학생의 마음이 떠오르고, 이렇게 위로해 주고 사랑해 주는 제자들이 사는 보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올해 1학기를 연구학기로 보내고 있다. 2월에 팀학생 명단을 확인하면서 내가 맡은 팀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나에게 힘이 된 존재가 누구인지 문득 떠오르게 되었다. 나의 형편과 마음을 먼저 아시고 필요할 때마다, 그 분은 어디선가 누군가를 보내셔서 그 분의 사랑과 위로가 나의 현실에서 실제가 되는 은혜를 주셨다. 한동대학교 교수가 되어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을 최대한 누리고 있었고 지금도 받고 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지나간 청춘 때보다 좋은 것도 많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리로다(이사야 40:9).”

김경미(글로벌리더십학부)
 

저작권자 © 한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