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독립전쟁의 여파로 프랑스 재정이 고갈되자 루이 16세는 이에 대한 세금의 충당을 제3신분을 뛰어 넘어 귀족들에게까지 부과하려 했습니다. 귀족들의 저항에 그는 제1신분인 성직자와 제2신분인 귀족 그리고 제3신분인 시민대표로 구성된 삼부회의 구성을 요구했습니다. 급기야 국민투표에서 투표권이 부여되지 않았던 일반시민들은 국민회의를 결성하고 이에 저항하기 시작했지요. 결국 국민회의를 강제로 해산하려는 루이16세의 움직임에 대해 시민들은 바스티유감옥을 점령했고 나라의 주권이 시민에게 있음을 선포하는 인권선언을 했습니다. 그들은 프랑스왕정을 지지하고 있었던 이웃국가들의 침략에 맞서 싸우면서까지 국민공회를 결성하고 루이16세를 처형함으로서 국민이 국가의 수반을 뽑는 최초의 국민국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프랑스 시민혁명의 과정 속에 있었던 것이 파리꼬뮨, 즉 자치시정부입니다. 그 후 국민에 의해 선출된 로베르피에르 당통은 농민들에 대한 세금 부담을 줄였고 세금에 대한 균등분배의 원리를 적용했지만 혁명정부를 반대하는 이들에 대해 실시한 기요틴 공포정치는 또 다시 5인의 총재정부라는 복잡한 과두정을 낳았습니다. 결국 과두정이 가져온 국가적 혼란이 나폴레옹에 의한 왕정복고의 원인이 되었지요. 그렇다면 프랑스 시민혁명이 우리에게 주는 역사적 교훈은 무엇일까요?
이 문제에 답하고 있는 사상가가 바로 영국의 에드먼드 버크입니다. 그가 지적한 것은 바로 대안 없이 무조건적으로 합리적인 이성 만에만 몰두 했던 프랑스 시민혁명 이후의 프랑스 정세였습니다. 자신의 일생을 통해 지켜보았던 프랑스 시민혁명의 폐해는 강력한 지도자의 부제가 가져온 파리꼬뮨정부의 무질서와 로베스삐에르의 공포정치가 야기한 사회분열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대안 없이 왕정 시기의 질서보다 더 혼란한 사회상황을 만들었던 파리 꼬뮨의 무능함을 버크는 지적했던 것이고, 이러한 사회적 변혁 속의 무질서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전통적 지혜를 가진 정치적 리더쉽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시점에서 본다면, 프랑스 시민혁명에서 전제되었던 합리적인 이성이 개혁을 대표하는 핵심어가 될 것이고, 에드먼드 버크가 언급한 전통적 지혜와 강력한 리더쉽에 의한 점진적인 변화과정이 아마도 보수를 대표하는 핵심단어가 될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지적해 보아야 할 것은 합리적 이성에 근거한 프랑스 시민혁명 과정도, 에드먼드 버크가 전통적인 지혜에 근거한 강력한 리더쉽을 강조한 것도 모두 설득력있는 주장이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교훈은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있었습니다. 4.19 학생의거가 그러했고, 이후 제2공화국의 무능함이 야기했던 정치적 혼란도 그러했습니다. 우리 한동인들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언급해 본다면, 필자는 한동인의 학문과 성경을 전제로 한 사회참여적 과제가 바로 이들 두 가지 역사적 교훈과 주장 속에 공존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불합리한 사회구조에 대한 변혁의 필요성을 직시했을 때 그것을 바꿀만한 학문적 지식과 사회적 역량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학문을 통해 역사적 교훈을 공부해 오지 않은 이들에게 과연 이러한 필요조건들이 마련될 수 있을까요? 이성적 판단과 전통적 지혜를 함께 추구할 수 있는 한동인이 되려면 역사에 대한 학습과 고민이 평소 역사서 열독을 통해 갖추어져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천고마비의 계절 바쁜 시간을 쪼개어 도서관과 책방에 들려 마음에 드는 역사서를 골라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국제어문학부 박만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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