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빛으로 차오르던 벚꽃과 함께 시작한 봄이 이제 다 지나갔습니다. 봄이 오면, 누군가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걸을 벚꽃 길을 떠올리고, 누군가는 추위가 지나간 자리를 채울 따뜻한 봄바람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그런 따뜻한 봄일랑 접어 두고 누군가에게 영원히 잔인함으로 남을 봄에 대하여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2014년 4월, 한 척의 배가, 수많은 생명을 태우고 있던 한 척의 배가 바닷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가라앉은 배에 타고 있던 생명 대부분은 죽었고, 몇몇은 이곳에 돌아와 절대 이전과 같지 못할 삶을 이어가고 있으며, 또 다른 몇몇은 두 해가 가득 찬 시간이 지났음에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배에 속한 생명은 이들로 끝이 아닙니다. 이곳에 남겨진 그들의 가족, 연인, 친구들은 여전히 길 위에서 소리치고 있습니다. 왜 자신의 소중한 사람이 그 차가운 바닷속으로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알려달라고 소리치고, 그 이유를 알지 못해 고통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공감해야, 아니 공감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도 언젠간 그런 사고와 아픔이 찾아올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면, 다음은 당신 차례일 것이기 때문에? 그것도 분명 이유가 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정말 솔직하게 말하면, 아마 우리 중 많은 이들이 그러한 사고나 아픔과는 무관한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살면서 작은 교통사고 한 번 겪지 않을 확률도 매우 높죠. 그럼, 그럼에도 우리가 그들의 아픔에 최선을 다해 공감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머릿수만큼 다른 답이 존재할 수 있겠지만, 저는 그중 하나의 대답을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입을 빌려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는 이번 학기 하나인에서 함께 읽고 있는 책 『존재와 다르게 - 본질의 저편』의 저자입니다.

레비나스는 말합니다, ‘나’의 삶은 ‘너’로부터 시작한다고요. 그에 따르면 ‘나’라는 존재는 아는 것도, 알 수 있는 것도 매우 제한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너’를 포함한 이 세계는 매우 넓고 깊어 내가 이해할 수도, 포섭할 수도 없는 어떤 것입니다. 레비나스는 ‘나’의 삶이, 내가 죽었다 깨나도 알 수 없는 세계인 너에게, 그의 표현에 따른다면 ‘타자’에게 근거해있다고 말합니다. ‘나’는 그저 여기에 존재할 뿐이지만 ‘네’가 나의 삶에 들어와 네 존재를 드러내면, 나는 그 존재에 응답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타자의 존재와 호소에 응답하면서 나의 삶의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너를 ‘지배하는’ 주체가 아닌 너에게 ‘응답하는’ 주체로서 말이죠. 네가 나의 삶에 들어와 너의 존재를 드러내 주어야만, 내가 비로소 나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 자아를 견고하게 만드는 작업을 하며 살아왔을 것입니다. 어쩌면 세상과 타자이라는 불확실성에서 나를 견고하게 만드는 것으로 우리의 불안을 잠재웠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럼 이제는 레비나스의 말처럼 견고하게 쌓아온 우리의 자아를 무너뜨리며 타자에게 응답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어쩌면 나를 무너뜨리고, 네 아픔을 내 삶에 들이는 과정에서 우리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는지 모르는 일입니다.

나의 삶이 너에게서부터 비롯한다는 어느 시인의 찐-한 삶의 고백으로 이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도 언젠간 길 위의 고통을 향해 이런 고백을 내뱉을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요.

"나는 곧 당신이어요"

한동아시아인권법학회(하나인) 언론정보문화학부 11학번 정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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