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다’는 말이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도 예외는 아니다. 투쟁을 위해 걸어온 한국 역사의 발자취 그 중심에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이하 5·18민주화운동)’이 있다. 많은 시민이 죽음을 무릅쓰고 항거하며 민주주의를 외쳤던 1980년 5월 18일, 그 날을 되새겨보자.

 

 

따듯한 햇살과 푸르른 새싹이 넘실대는 계절, 5월이 돌아왔다. 하지만 초록빛 가득한 계절 분위기와 달리, 한국 근현대사 속 5월은 핏빛으로 가득하다. 1980년대 당시, 전국의 시민들은 민주화에 대한 염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전두환을 필두로 세운 신군부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그들의 즉각 퇴진과 비상계엄령 철폐를 요구하는 광주 시민들이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 새벽까지 열흘 동안 신군부 세력과 맞서 싸웠다.

거리로 나선 시민들

지난 4월 30일, 5·18민주화운동의 근원지, 광주를 방문했다. 36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광주 곳곳에는 5·18민주화운동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다. 먼저, 곳곳에 흩어진 흔적을 한 데 모아놓은 5·18민주화운동 기록관을 찾았다. 작년 5월 개관한 5·18민주화운동 기록관은 5·18민주화운동 관련 기록물을 발굴 및 수집해 관리하는 곳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된 5·18기록물 등 다양한 기록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가장 먼저 들어선 1층 상설전시실에는 1980년 5월 16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3만여 명의 시민들이 참여했던 횃불 대행진의 모습부터 5월 27일 광주 민주화운동이 막을 내리는 날까지의 모습과 기록이 구체적으로 담겨있다. 또한, ‘학살’이라는 주제를 가진 전시실 한 벽면에는 5·18민주화운동의 사망자와 실종자 명단이 있다. 당시 계엄군에게 학살된 165명의 모습이 담긴 흑백 사진과 함께 이름, 출생연도, 직업, 사망원인 등의 신상정보가 빼곡히 적혀있다.
 전시관 1층에는 공수부대의 과잉 진압에 격렬히 저항하는 광주 시민들의 모습을 담은 ‘저항’ 코너부터, 계엄군의 언론 검열로 인해 시민 스스로 탄생시켰던 언론인 투사회보를 소개하는 ‘투사회보’ 코너까지. 계엄군에 맞서 민주화를 위해 주체적으로 움직인 광주 시민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김공휴(57) 씨는 “그 당시 임신 8개월이었던 최미애 씨는 집 앞에서 남편을 기다리고 있다가 계엄군이 쏜 총에 이마를 맞아, 배 속에 있던 태아와 같이 사망했다”라며 “계엄군의 만행은 상상을 초월했고 야만적인 과잉진압에 광주 시민들은 모두 길거리로 나섰다”라고 말했다.
 2층 상설전시실2로 가면, 민주주의 실현에 대한 기대와 열망으로 대학생들과 교수들이 작성한 성명서 여러 장이 눈에 띈다. 1929년 광주에서는 일제의 식민 통치에 항거하는 광주 학생들의 주도로 항일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광주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돼, 3·1운동 이후 벌어진 가장 큰 규모의 항일운동이 됐다. 5·18민주화운동도 예외는 아니었다. 5·18민주화운동 가운데에서도 광주 학생들은 큰 힘을 발휘했다. 김 씨는 “계엄령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광주 학생들은 광주 시내에 모여 ‘비상계엄령을 해제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했다”라며 “그때 계엄군이 투입되면서 학생들에게 폭력을 행사했고 그것을 말리는 어른들에게도 무차별 폭력을 행사하는 만행을 저질렀다”라고 말했다.
 기록관 내부에서는 학생들의 구술증언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당시 상황을 겪은 한 학생은 영상에서 “학교 정문 앞에서 보니 공수부대가 총에 대검을 착검하고 양쪽으로 열 명씩 쭉 있고 뒤에서 전차가 서 있었다”라며 “이 학교는 우리 학교니까 물러가라며 큰소리치고 하니까 거기서 군인들이 밀어내라고 소리쳤다”라고 말했다.

진실을 알리지 않은 언론


광주 학생들의 성명서가 전시돼 있는 곳을 지나면 5·18 당시 각종 기록물과 필름이 있는 *수장고가 나온다. 복사본과 원본 기록물을 모아놓은 전시관 한 켠에는 5·18 당시 상황을 상세히 기록한 <여고생의 일기>를 발췌한 쪽지가 있다. 일기는 “입으로 말할 수 없는 갖은 만행을 벌여 사망자는 밝혀진 사람만 해도 200명을 능가하고, 실종자는 거의 한 동에 몇 사람꼴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매스컴은 일절 이러한 사실을 발표하지 않았으며 완전한 정부 편에 서서 우리 민주시민들을 폭도로 몰고 있었다”라고 당시 신군부의 언론 통제에 대해서 서술한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이춘봉(57) 씨는 “계엄군은 방송이나 신문을 전면 통제했고 외부로 나가는 통로를 모두 막았다”라며 “실질적으로 그때는 계엄군의 만행 때문에 분개했는데 마치 우리가 폭도인 양 언론에서는 몰아갔고 광주 시내에 일어나고 있는 실제상황을 전혀 사실대로 보도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또한, 기록관에는 ‘5월 27일 언론들은 정부의 발표 그대로 무장 저항하던 폭도 17명을 사살하고, 295여 명을 체포했으며, 도청과 경찰국 등 주요 청사와 시가지를 완전히 회복시켰다’고 적혀있다. 특히, 항쟁 기간 내내 당시 언론들은 ▲‘북동 궁광식품에 난입’ ▲‘버스 2대 군 지프 탈취’ ▲‘대형 버스 3대 등 버스 7대 탈취’ 등 과격시위에만 초점을 맞춰 광주 시민들을 더욱 분노케 했다.
 이 같은 언론의 계속된 왜곡보도에 광주 시민들은 발을 벗고 나섰다. 그들은 진실 앞에 침묵하는 언론을 대신해, ‘투사회보’를 만들어 언론의 역할을 대신했다. 1층 상설전시실1에는 투사회보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함께 청년들이 일일이 등사하는 모습을 그린 조형물이 있다. 기록관 설명에 따르면, 들불야학의 교사들과 학생, 청년노동자들은 밤을 새워가며 B5용지 한 장짜리 투사회보를 제작했다. 제작에 참여했던 이들은 투사회보 배포와 함께 취재활동을 병행했다. 김 씨는 “투사회보는 광주의 실상을 시민들이 제대로 알고 파악할 수 있게끔 하는 데 큰 역할을 했고 지금 5·18민주화운동을 이해하는 좋은 근거 자료가 된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라고 말했다.

씻지 못할 그 날의 아픔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그 당시의 상황을 어떻게 기억할까? 현재 5·18민주화운동부상자협회에서 총무국장을 맡고 있는 박명환(55) 씨를 통해 그의 생생한 증언을 들어봤다. 19세의 어린 나이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박 씨는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1980년 5월 20일 저녁, 박 씨는 계엄군에게 돌을 던지며 싸우다 체포될 뻔했으나, 가까스로 몸을 숨겨 죽음을 면했다. 계엄군의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그는 다음날 다시 도청으로 향했다. 박 씨는 “5월 21일날 분수대를 앞에 두고, 도청 앞에서 계엄군과 대치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1시경 옥상에서 발포했다”라며 “그때 제가 팔에 총상을 입었는데, 제 옆에 거의 20명 남짓한 사람들은 총을 맞고 죽었다”라고 말했다.
 총상을 입고 전남대학교 병원에 간 박 씨는 그곳에서 여섯 살배기 남자아이가 총을 맞아 피를 흘리며 우는 모습을 보고 또 한 번의 충격을 받는다. 박 씨는 “지금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모르겠지만, 아직도 그 울음소리가 귀에 따갑게 울린다”라고 말했다. 죽음을 무릅쓰고도 투쟁을 계속했던 이유에 대해 묻자 그는 “군인들이 괜히 사람들을 쫓아가 곤봉으로 때려죽인다는 소문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라며 “저뿐만 아니라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모든 광주 시민들이 분노로 일어났다”라고 말했다.
 특히 전남대 병원을 포함한 광주 시내 병원엔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폭행과 총상을 입은 중상자들이 넘쳐났고, 병원들은 수혈에 필요한 피가 턱없이 부족했다. 이에 시민들은 팔을 걷어붙이고 병원으로 달려갔고 중·고등학생, 가정주부들도 헌혈에 동참했다. 박 씨는 “그때 광주 시민이라면 다들 똑같은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라며 “참상을 바로 자기 눈앞에서 목격하고 자기 형제, 부모가 죽는데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는가”라고 말했다. 끝으로 그는 당시 신군부 세력이 아무것도 모르던 광주 시민들을 죽인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다며 아직 지워지지 않는 그 날의 아픔을 이야기했다. 박 씨는 수많은 희생자들을 뒤로한 채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할 뿐이라며 36년 전을 회상했다.

▲ 김운영 사진기자

5·18민주화운동 기록관에서 518번 버스를 타고 도착한 국립묘지엔 5·18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의 묘비들이 빼곡했다. 묘비 곳곳에는 그들을 추모하기 위한 색색의 꽃들이 가득했고, 5·18 묘지 중앙에 위치한 추모탑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핏빛으로 물든 그 날과는 달리, 그곳의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수많은 희생자들이 잠든 그곳에서 그분들의 넋을 기리며, 발걸음을 돌린다.

*수장고: 박물관, 미술관, 전시실 등에 전시된 유물이 보관되는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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