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부쩍 차다. 어느새 다들 코트를 입고, 누군가는 목도리도 했다. 학교 캠퍼스를 산책하다 보면 보물처럼 찾을 수 있는 연한 갈색의 자그맣지만, 꽤 통통한 고양이도 추워 보인다. 안쓰러워 보여서 잠시 따뜻한 손길을 주려고 해도, 사심 가득하다는 걸 아는지 내 손을 피해 도망가곤 한다. ‘설마 얼어 죽겠어’라는 희망 한 줌, ‘쟤도 제 살길 알아서 찾겠지’라는 포기 한 움큼을 쥐고선 지나쳤다.
차가워지는 날씨 덕에 새내기 적, 선배들이 진담 반 농담 반으로 하던 ‘한동에는 여름, 겨울, 딱 두 계절밖에 없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아주 얇은 반소매 옷과 아주 두꺼운 긴 소매 옷만 필요하다기에 한참을 웃었었다. 봄과 가을을 느낄 틈 없을 만큼 시간 참 빨리 지나간다고 선배들은 느꼈으리라. 새삼 그때 그 말이 떠올랐다. 이런 빠름과 날씨, 계절은 벌써 단순 햇수로만 5년째 경험하는 거라 적응됐을 법도 한데, ‘이번만은 다르겠지’라는 희망 때문에 매번 적응하기 힘들다.
이 빠름은 봄학기보다 가을학기가 체감상 더 심하다. 아마 봄과 초여름을 끼고 있는 봄학기보다, 한여름의 끝자락에서 초겨울로 바뀌는 가을학기의 격차가 더 심하기 때문일 거다. 그 때문에 마치 한동에는 ‘여름과 겨울’ 두 계절만 있다고 느끼는지 모른다. 우린 대체로 자극보다 미적지근한 것에 상대적으로 무신경하니까. 그리고 관심을 끊기 훨씬 쉬우니까.
하지만 자극적인 것에 더 격렬히 반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비단 계절의 변화뿐만 아니라 사회적 이슈에 대한 반응도 마찬가지다. 국가와 사회를 막론하고 더 자극적인 것에 더 격렬히 반응하는 것은 모두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뿐만 아니라 어느 사회건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이런 한국사회의 반응에 대해 냄비근성이라니, 미개한 국민성이라니 하는 자조는 필요 없다. 자극적일 때조차 반응하지 않는 게 진짜 두려워해야 할 상황이다. 그건 ‘무관심’이며 ‘포기’와 같은 의미니까. 자극적일 때라도 격렬히 반응하고, 장렬히 타면 작게나마 희망이 존재하는 셈이다.
한 달 전쯤, 한동대는 차갑게 얼어붙었다. 학교 버스와 한 차량이 충돌하는 사고가 있었다. 학생들은 희생된 누군가를 슬퍼했다. 그리고 희생된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했고, 그들을 위해서 뭐라도 하고자 했다. 굳이 사고를 다시 입에 올리는 이유는 희생된 누군가를 다시 떠올리고자 함이 아니라, 희생된 누군가를 위한 학생들의 몸짓에서 ‘희망’을 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희망은 뜨거웠다. 그 누구도 차갑지 않았다. 자기 일이 아니었지만, 이웃의 일처럼, 마치 내 일처럼 슬퍼했다.
차갑게 얼어붙던 한동대에 2주 전쯤, 이번에는 자그마한 불이 일었다. 여론이 폭발하며, 학생들은 뜨겁게 분노했다. 그 뜨거움은 다양한 데서 왔다. ‘내가 낸 등록금’을 유용했다는 것, ‘한동의 룰, 아너코드’를 어겼다는 점, ‘도덕적’이지 않았다는 것, ‘겉으로만 정직한 척’ 했다는 것 등 대부분 학생은 차갑지 않았다. 비꼼으로 비난으로 책임 요청으로, 각자 자기만의 방법으로 이 뜨거움을 나타냈다.
이 두 일에 총학생회는 각각 견해를 밝히고 차후 계획한 일정을 알렸다. 버스 사고가 있었음을 알리고 추후 계획, 사후 조치 등을 말했다. 그 조치가 적절한지에 대한 것과는 별개로 학생들은 그 자체에 관심을 가졌다. 장학금 문제에 대해서는 변명 가득했던 첫 사과글과 열흘이 지나고 다시 올라온 사과글에 학생들은 반응했다. 비록 그 사후조치가 진짜 이뤄지는지는 더 지켜봐야 할 일이지만.
이처럼 총학생회가 어떤 일에 대해 의견을 밝히는 공지글은 히즈넷에서 높은 조회 수를 기록한다. 다른 히즈넷 공지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월등하다. 삶이 바빠서 모른 척 차갑게 앉아있는 것 같지만, 모두는 ‘학생자치가 어떻길 희망한다’고 보이지 않게 계속 뜨거운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만큼 학생들은 상대방의 일, 그리고 학생 정치와 나아가서 사회에 무관심하지 않다. 모두는 함께 뜨겁길 희망한다.
한동대가 냉탕과 온탕을 계속해서 오가는 중, 찾아볼 수 있던 것은 ‘희망’이었다. 차갑게 대할 수 있었던 일을 차갑지 않게 대하던 학생들을 보며 ‘희망’을 봤다. 그 뒤 일어난 불길과 그 불에 뜨겁게 반응하던 학생들을 보면서는 ‘희망’에 대한 믿음을 봤다. 이 희망에 대다수 학생은 뜨거웠으며, 차갑지 않았다. 바뀔지, 바뀌지 않을지보다, 그리고 어떻게 바뀌는지보다 중요한 것은 여전히 나를 비롯한 많은 학생이 ‘희망’한다는 것이었다.
세상을 바꾸자는 한동대 구호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게 희망과 거리가 먼, ‘무관심’, ‘포기’같은 단어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접을 순 없다. 희망에 대한 그 믿음은 뜨겁지 않아도 괜찮다. 차갑지 않기만 해도 괜찮다. 포기하지 않고 붙잡고만 있어도 반은 지키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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