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은 그의 책 팡세에서 말하기를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난보다 견디기 어려운 것이 권태라고 말한다. 가난을 이기지 못하여 자살을 하는 삶보다 권태를 이기지 못해서 자살을 하는 사람이 더 많다고 이야기한다.

가난이 인간의 삶에 있어서 육신적인 고통을 상징한다면 권태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정신적인 혹은 영적인 고통을 의미한다. 권태라고 하는 것은 반복되는 행동이나 일 속에서 혹은 습관적인 삶의 패턴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인간 내면의 증상이다. 그러므로 권태는 일종의 지루함이다. 그리고 지루함이란 인간의 반복되는 행동이나 습관 속에서 새로움을 경험하지 못하기에 나타나는 심리적인 증상이다. 즉 권태로움은 새로움의 부재 현상의 결과이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내면세계는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새로움이 없으면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인간은 먹을 양식이 없으면 살지 못한다. 양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인간은 그 양식을 소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그 음식의 모양이나 맛이 새로워야 한다. 그러므로 동물에게 없는 요리는 인간에게만 있는 일종의 문화이다. 같은 소고기를 먹어도 다른 모양과 요리를 해서 먹어야 한다. 음식의 모양과 맛이 날마다 같으면 식욕을 잃는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먹을 양식이 없었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셨다. 처음에는 그 만나를 보고 너무 기쁘고 신기했다 그러나 얼마 후에 그들은 불평한다. 그 이유는 그 만나에 새로움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여행을 즐기는 이유도 집안에 가구를 바꾸거나 아직 쓸 수 있는 자동차를 새것으로 바꾸는 것도 다 같은 이유이다. 그러한 새로운 것 통해서 새로움의 경험을 통한 자신의 존재 변화를 시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기에 인간만이 지니는 인간의 존재방식과 삶의 방식의 특성이다.

문제는 사람이 새로운 여행지를 통해서 혹은 새로운 자동차나 새 가구 등을 구입하면서 진정한 새로움을 느끼는가? 아니 새로운 존재의 변화를 가져오는가? 전도서 1:9절에 “해아래 새것은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 정말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새것이 없는가? 아니다 많다 많아도 너무나도 많다. 날마다 새로운 상품들, 새로운 기계나 물품, 발명품들이 홍수 같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해아래 새것이 없다‘는 말씀은 인간의 심리적인, 혹은 인간 내면의 의미론적인 관점에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인간은 아무리 새로운 발명품을 만들어 내도 인간은 피조물이기에 인간은 피조물들을 통해서는 인간이 진정으로 새로워질 수 없다는 의미이다

고린도후서 5:17 절 말씀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 이라고 놀라운 말씀을 하고 있다. 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자, 혹은 하나님의 자녀, 또는 성령으로 거듭난 자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새로운 존재됨이 가능하다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인에서 실존적인 새로움을 경험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진정으로 우리의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 경험하는 것이 새로워 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실존적이라는 것은 믿음이나 말씀이 관념적이거나 교리적인 데에서 머무르지 않고 우리 각자의 존재됨의 새로움을 구체적으로 경험케 하는 말씀이라는 의미이다. 새로운 학기를 맞이하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인 교수로서, 학생으로서의 학문과 학업의 새로움과 믿음의 새로움을 경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최정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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