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대학교의 특별한 점이 무얼까 묻게 될 때가 있다. 스스로 보아도 뭔가 다르고 남들도 굳이 그렇다는데, 정작 “이게 우리 특징이야”라고 말하고 나면 자꾸 부가 설명을 붙여야 해서 난감하다. 기독교 대학이라 하지만 그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다르고, ‘정직’도 기준을 한껏 높여 보면 상대적이다. 복수전공으로 융합과 창조의 능력이 좋다는데 정작 교수들은 전공지식의 부족을 걱정한다. 교수와 학생의 관계가 특별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 관계도 보모-유아의 관계로부터 대장-졸병의 관계까지 참 다양도 하다.
 최근 이 모든 긍정적인 요소들을 관통하면서 그 원인으로도 결과로도 볼 수 있는 한 가지 특징을 생각하게 되었다. 바로 자발성이다. 한동대학교에는 “우리 OO 한 번 해 볼까?”하는 이들이 많다. 매 학기 이런저런 모임과 학회, 동아리들이 만들어진다. 최근에만도 세월호 참사 1주기 추모를 위한 모임, 학내 비정규직 문제를 고민하는 모임, 여러 공부 모임들이 생겨났다. 여기에 “친구들끼리 한 번 올려 보려고” 공연을 기획하는 팀이나 공모전을 준비하는 팀들, 자발적인 봉사 모임까지 생각하면 그 수는 더 늘어난다. 교수들도 이런 일들에 호응하거나 지원하는 것에 몸을 사리지 않는다. 우리학교의 여러 특징들이 결합되어 이러한 자발성과 적극성을 낳고, 그 역동성이 다시 특별함이 되는 셈이다.
 자발성의 문화는 만들기 힘든 자랑스러운 성취다. 그러나 이 문화는 미묘해서, 섬세하게 지키지 않으면 금방 사라진다. 그래서 그런 문화에 걸림이 되는 일들을 피하고 잘 가꾸어가야 한다.
 우선 자발성의 문화를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나의 시도 뿐 아니라 남들이 자발적으로 꾸려가는 일들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노력의 결과가 좋지 않다고 해서 “여기선 해도 안 돼”라는 자괴감과 냉소에 빠지면 곤란하다. 자발성 자체가 힘이고, 학교가 그러한 자발성의 장이 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기 위해서건 특정 사안에 대한 반대 의견을 개진하기 위해서건 스스로 모이고 조직한다는 사실 자체가 귀하다.
 자발성은 배우는 것이지만,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 “자발적으로 OO을 하라”는 식의 모순된 요구나 “왜 자발적으로 참여하지 않나”라는 엉뚱한 비난이 횡횡한다. 그러나 남에게 자발성을 강요하지도, 남의 눈치 때문에 자발성을 흉내 내지도 말아야 한다. 알아서 침묵하는 자기검열은 물론 더 나쁘다. 자발적으로 시작한 일이 어느새 전통이 되어 강요와 강제가 되는 경우도 피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행사와 전통이라도, 처음 마음이 사라졌다면 겸손하게 그만 두는 것이 낫다.
 자발성을 조직, 조정, 유도, 통제하려는 유혹을 피해야 한다. 자발적 활동이 활발해지면 일사분란한 질서는 유지하기 힘들다. 다소 비효율적인 반복, 열정 때문에 생기는 오해와 반목도 자발성의 대가다. 이 대가를 치르기 싫어서 여러 가지 노력들을 통합하거나 조정하고 통제하려는 것은 미련하다. 넓은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특별한 장난감 없이도 즐겁게 뛰놀듯이, 신뢰와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오히려 자발성의 꽃을 피운다.
 늘 당연하게 여겼던 한동의 자발성이 새삼스러운 것은 싱가포르에서 보낸 연구년의 여파다. 부유하고 안전한 곳이었지만 정교한 통제와 감시 속에 자발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대학과 사회를 보며 숨이 막혔다. 자발성의 문화는 점점 숨 막히는 곳이 되어가는 우리 사회의 산소통이다. 그 문화를 돌보고 가꾸면 세상이 달라진다.

손화철 글로벌리더십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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