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낯 뜨거운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몇 주 전 팀 교수님께서 팀 모임 시간에 채플 시간에 자는 것과 카카오톡이나 페이스북과 같은 SNS(Social Network Service)사용을 자제할 것을 당부하셨다. 누군가는 지적해주었으면 좋았겠지만, 나서서 팀원들에게 쉽게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교수님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혼란스러웠다. ‘예배의 자세에 있어서 교수님께서 지적을 하실 만큼 우리가 예배에 소홀하고 있다는 것인가?’, ‘예배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구약시대를 살펴보면, 예배는 굉장히 엄숙하고 예배자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낮추게 했다. 기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제단에는 동물의 피가 바닥에 낭자했고, 가죽과 내장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적셨다. 동물의 울음 소리와 고기가 타는 냄새가 자욱했다. 사람들은 제사로 드려지는 동물들이 고통 속에 죽어가는 것을 보아야 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정한 제사의 법칙이었고 규율이었다. 동물의 죽음이 곧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나 자신을 대신했던 제사임을 기억했다. 마음이 숙연해졌을 것이다. 나의 죄로 인해 제단의 동물과 같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달았을 때 사람들은 애통하였을 것이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과 부활로 더 이상 이러한 피 흘림의 제사는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예배의 형식은 바뀌었지만 예배의 정신과 본질까지 같이 바뀐 것은 아닌지 돌아보았으면 한다. 죽음이 있었기에 숙연했고, 애통하는 마음이 있었고, 그 이후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이 살아났던 그 구약 시대의 엄숙함과, 모든 죽음을 초월해서 생명으로 옮기신 예수께 대한 감사함, 찬양, 감격을 드리는 것이 예배의 본질이 아닐까.
 어느 한 선교사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나의 가장 친한 가족이 내 눈이 보는 앞에서 강도에 의해 살해당해서 피가 낭자한 상태로 죽은 것을 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아주 실제적인 표현이며, 실제적 죽음에 대한 우리의 반응으로서의 예배는 아주 당연스러운 일이 될 수 밖에 없음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비유이다. 예배는 자발성과 감사함과 찬양과 감격을 할 준비된 마음으로 드려지는 능동적 행위이다. 완벽함으로 준비된 마음은 아니어도 적어도 죄로 인해 나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해 긍휼함을 베풀어주길 바라는 겸허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
 교수님께서 지적하시기 한참 전부터 예배의 본질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카카오톡 사용과 조는 것이 본질의 상실이라는 커다란 빙산의 일각은 아닐까. 예배는 ‘완벽해지면 드릴거야’가 아니라 ‘부족해도 용서받을 것을 믿고 나아가는 것’이라는데,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무뎌진 무관심은 아닐까.
 예배의 본질의 회복은 그렇다면 어디에 있을까?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예배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해온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가장 사랑하고 경외하는 대상에게 주어야 할 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이다. 하나님도 그 다른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을 요구하신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일지라도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며 통회하는 마음임을 알고 있다면, 적어도 성령의 인도함과 긍휼함을 구하는 기도로 예배를 시작하고, 핸드폰을 끄고, 예배에 집중하는 ‘구체적인 행동’부터 시작하는 것이 본질의 회복이 아닐까

김재인(상담심리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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