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재활용, 공간에 대한 새로운 해석

▲ 대구예술발전소 전경 사진제공 대구예술발전소

환기구를 고르러 나온 어르신들과 여러 공구 가게를 뒤로하고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한참 걸어 도착한 곳은 ‘대구예술발전소(이하 예술관).’ 예술관은 공구골목으로 유명한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구에 있다. 외형만 보면, 흔히 보는 예술관의 세련됨과는 거리가 있는 창고다.


기능이 사라진 공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다
예술관은 1층부터 독특한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옛 창고답게 높은 천장에는 이선규 작가의 <기습>이 전시돼 있었다. 검은 한지로 된 검객들이 떨어져 내리는 모습은 압권이다. *레지던시가 있는 4층에서 설명을 듣기로 했다. 주말이지만 예술관 김한아 프로그램 코디네이터의 건물에 대한 친절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별관이었던 곳을 리모델링하는 사업에 채택돼서 국비와 시비를 합쳐 리모델링을 했습니다. 지금은 총 5층까지 있고요. 이 공간을 문화예술공간으로 리모델링한 거에요.”
지난 2008년 10월, 옛 KT&G 연초제조창 별관창고는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역근대산업유산을 활용한 문화예술 창작벨트조성>에 시범사업으로 선정됐으며, 대구시가 이를 국비와 시비 각각 80억 원을 투입해 리모델링했다. 옛 별관창고는 낙후된 구도심을 재생하고 실험적 예술창작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서 예술관으로 지어졌다.
“4층에서는 텐토픽프로젝트(Ten-topic project)가 진행되고 있어요. 작가들 레지던시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심사를 통해 작가를 선정해서 입주하게 하고 있습니다. 5층에는 음악과 무용 작가들이 있고요. 특이한 점은 오픈 스튜디오라는 것입니다. 시민이 자유롭게 와서 작품을 구경하고 작가와 직접 이야기도 나눌 수 있고요. 주말에는 시민 참여 프로그램을 해요.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과 연관된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텐토픽프로젝트는 예술관의 주된 사업이다. 이 사업은 공연예술분야와 시각예술분야를 아우르는 예술가 상호 간의 소통과 협업을 통하여 새로운 형태의 예술을 창조해 내는 실험적인 프로젝트다. “대화와 공동 활동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것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기적을 일으킨다. 집 안에 친밀감을 더 많이 조성하라. 그러면 당신은 세상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더욱 친밀해질 것이다.” 디자이너이자 자선가인 소린 밸브스(Xorin Balbes)의 <공간의 위로>에 나오는 문장이다. 공간은 특별한 재주가 있다. 공간이 변하면 사람의 행동, 생각도 변한다. 요즘은 공간이 가진 힘에 주목해 커뮤니티 하우스 같은 개념이 등장하는 추세다. 이들 공간은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서로 소통을 통해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게끔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영국의 테이트 모던(Tate Modern) 갤러리는 방치돼 있었던 뱅크사이드 발전소를 현대미술관으로 새롭게 변화시켰다. 현재는 매년 500여만 명이 찾는 관광명소가 됐다. 수력발전소를 레스토랑과 카페, 갤러리로 바꾼 와핑프로젝트(Wapping Project)는 내부 또한 그대로 남겨 주목을 받았다. 화력발전소, 신발공장과 같이 기능이 부여된 공간에 그 기능이 사라지게 된다면 쉽게 버려진다. 플라스틱, 철은 재활용되지만, 산업의 패러다임 변화 속에서 도태된 공간들은 재활용이 어렵다. 하지만 이러한 공간들을 재활용하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이를 ‘공간재활용’이라고 한다. 예술관도 공간재활용으로 다시 태어난 건물에 속한다. 이들 건물은 주변환경과의 소통을 통해 문화체험의 장이 되고 있다. 예술관은 시민을 대상으로 ‘버스킹문화체험’, ‘초단편영화제작기’, ‘캐리커쳐 그리기’ 등을 진행하고 있다.

▲ 실내의 연통마저 조형물이 됐다. 사진제공 대구예술발전소

건물의 기능과 형태 사이 간격을 넘어서
건물은 별관창고의 기능을 벗고 예술관이라는 새로운 기능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형태는 옛 별관창고 그대로다. 건축 역사상, 기능과 형태는 수많은 논의가 이뤄졌던 주제다. 경성대학교 건축공학과 정영수 교수의 <건축에 있어서 형태와 기능의 관계변화에 대한 역사적 고찰> 논문에는 20세기에 들어와서 건축가들이 ‘기능’이란 단어를 실제적 차원에 국한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바우하우스의 교장이었던 마이어(H.Myer)는 모든 형식을 거부하고 미가 건축의 진정한 목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즉, “형태는 기능에 따른다”라는 기능주의 탓에 직선과 각진 모서리로 딱딱해진 건물이 당연시됐다. 이 같은 해석은 1966년에 발간된 미국 건축가 벤투리가 “…나는 ‘순수한 것’보다는 ‘혼성품’이, ‘명확한 것’보다는 ‘애매한 것’을…’단순’보다는 ‘과다’를 좋아한다”라는 주장으로 탈현대주의 시대를 열기 전까지 계속됐다.
최근에는 이러한 관점을 거스르는 시도가 늘고 있다.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는 형태와 기능의 양립 가능성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를 설계한 자하 하디드(Zaha Hadid)는 동대문 플라자 공모전 당선 소감에서 “건축은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고 했다. 자하 하디드는 과거의 기능주의적 사고에서 탈피해서 곡선을 활용한 새로운 기능에 대해 이야기한다. 곡선으로 이뤄진 독특한 건물은 직선과 면으로 이뤄진 기존 건축의 틀에서 탈피해 공간을 지각하는 주체와 공간의 새로운 관계를 설정한다.
한편, 공간재활용은 보통 이전의 기능을 담던 형태를 그대로 보전하여 역사성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연세대학교 대학원 김현주 박사는 <도심재생 맥락에서의 유휴 산업시설 재활용 계획 방법 연구> 논문에서 “…외관과 구조의 재활용 계획 방법은 ‘보존’에 의한 산업시설의 역사성과 정체성의 보존, ‘변형’에 의한 문화공간의 새로운 상징성 구축, ‘복원’에 의해 지역의 오래된 장소성을 재현하고자 하는 방향성을 가지는 것으로 분석되어질 수 있다”라고 했다.
김한아 씨가 4층에서 창문 너머로 보이는 외벽을 가리키면서 설명을 이어갔다.
“예술관의 겉모양은 옛 별관 모양 그대로입니다. 여기 빨간 벽돌 자체가 그때 있었던 벽돌들입니다. 새로운 벽돌로 리모델링한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벽돌을 이용해서 한 것입니다. 흰색 뼈대 같은 것들 있죠? 다 옛 건물에 있던 것입니다. 공장이었던 곳을 깔끔하게 변신시켰다고 보시면 됩니다. 하지만 안은 다릅니다. 예술관이나 레지던시에 맞게 변형시켰어요.”
예술관 주위는 낙후된 구도심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낡은 건물이 가득하다. 해방 직후인 1947년, 미군부대에서 나온 폐공구와 철물을 가공하는 가게들이 모여 형성된 골목은 1970년대 산업화를 맞아 전성기를 누렸으나 1997년 금융위기와 전반적인 산업 침체로 활기를 잃어버렸다. 예술관은 침체된 골목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으려 하고 있다.
“건물 주변 환경 자체가 본관이 있었던 곳은 비워진 지 오래여서 공장건물이 덩그러니 있었던 상태였고 옆에는 아무것도 없는 폐허잖아요. 또 들어오는 골목은 오토바이 가게들과 공구골목이 있는 곳이고요. 저희가 그런 곳의 건물을 이용해서 문화예술창조공간으로 만들었다는 자체가 독특한 점인 것 같습니다.”
땅거미가 지고 있는 쌀쌀한 가을, 석양이 거친 외벽에 비쳤다. 예술관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나서인지 처음에 예술관이 줬던 심심한 인상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붉은 벽돌과 하얀 뼈대 각각이 예술작품으로 다가왔다.
공구골목의 공구점은 어느새 문을 닫고 불고기와 우동을 파는 포장마차가 문을 열었다. 포장마차는 공구골목의 2막이다. 넥타이를 풀고 하루를 털어내는 회사원의 얼굴들에는 웃음이 가득하다. 예술관과 같은 시도들이 낙후된 도심에 2막을 가져다 주길 기대한다.


*레지던시: ‘거주 프로그램’ 특정 지역에서 일정 기간 머물면서 작업을 하거나 문화체험, 전시 등의 활동을 하는 프로그램
*바우하우스: 독일 바이마르에 있던 조형학교, 1919년 설립되어 1933년 폐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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