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제례음악부터 퓨전국악에 이르기까지

국악은 우리나라의 전통음악과 최근의 한국적 창작음악까지를 포함해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나라 국악은 어떻게 발전해왔을까? 전통 국악부터 현대 퓨전국악에 이르기까지 그 역사에 대해 살펴보자.

전통음악의 두 갈래, 삼부악과 민속악


우리나라 전통음악은 삼부악(三部樂)과 민속악, 두 갈래로 나뉜다. 삼부악은 아악, 당악, 향악을 통칭하는 말로, 일반적으로 궁중음악을 가리킨다. 첫째로 아악은 왕실의 번영을 기리는 내용을 담은 제례음악이다. 현재 조선시대의 제례음악으로 가장 잘 알려진 문묘제례악이 이에 해당한다. 이것은 조선시대 초기에 많은 유교제사 의식에 이용되며 눈부신 발전을 이뤘지만, 연산군 시절 유교 의례를 배척하기 시작하면서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당악은 제례음악인 아악과 달리 궁중의 조회(朝會)와 연회에서 연주된 음악이다. 이것은 주로 궁중사람이나 지식계급이 흥취를 즐기는 용도로 이용됐다. 아악과 당악은 모두 당나라와 송나라에서 들어온 음악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하지만 향악은 이와 달리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우리 고유의 음악이라는 특성을 가진다. 이것은 백성으로 하여금 궁의 번영을 기리고 조선건국의 유구함을 기원하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또한 세종대왕은 <용비어천가>에 가락을 붙여 만든 ‘여민락’과 같은 노래를 백성들에게 보급해 한글을 전파하는 데 향악을 사용하기도 했다.


전통음악의 또 다른 갈래인 민속악도 궁중음악과 발맞춰 발전을 거듭해왔다. 예부터 서민들은 자신들의 유흥을 즐기기 위해 민속악을 발전시켜왔다. 민속악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국악이라고 알고 있는 시나위, 판소리, 민속극, 실내악 등이 있다. 그 중 실내악은 조선 후기에 등장한 신흥상인세력이 실내에서 음악을 즐기면서 본격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실내악에는 ‘도덕가’, ‘사친가(思親歌)’, ‘사향가(思鄕歌)’ 등이 있으며, 이는 유교사상과 더불어 민중의 흥취를 담아냈다.

1930년 최초의 퓨전국악 ‘신민요’ 등장


조선시대에 꾸준히 발전을 이룩해온 전통음악은 일제 강점기를 맞이하면서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일본은 문화말살 정책을 펴고 우리의 전통 문화를 억압하며 서양 문물의 전파를 장려했다. 이 때부터 종묘와 문묘를 제외한 모든 궁중 행사가 폐지되며 궁중음악 또한 더 이상 불릴 수 없게 됐다. 백성들도 나라 잃은 설움으로 문화예술 향유에 대한 정서를 상실했다. 궁중음악과 민속악 모두 일제의 억압 하에 침체기에 들어선 것이다.


하지만 서양 문물이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국악에 새로운 흐름이 생겨났다. 당시 서양음악을 접한 우리나라 음악인들이 전통음악에 서양음악을 접목하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신민요’가 있다. 신민요는 우리나라 민요에 서양악기를 이용한 것으로 퓨전국악의 효시로 여겨진다. ‘도라지타령’, ‘태평가’, ‘돈타령’ 등이 이에 속한다.


1980년대에는 국악의 대중화와 현대화를 목적으로 만든 국악가요가 유행했다. 국악가요는 가야금과 같은 전통선율악기와 기타, 신디사이저 등 서양 화성악기의 결합으로 이뤄졌다. 이것은 국악의 가락을 살려 대중들이 쉽게 부를 수 있도록 만든 민요풍의 창작가요이다. 오늘날의 국악은 이처럼 퓨전국악이 주를 이루고 있다. 현재 국악은 밴드와 오케스트라, 현대무용, 뮤지컬 등과 결합돼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대중의 인기를 끌고 있다.

최근 국악에 맞춰서 추는 비보이 댄스, 국악 반주에 맞춘 난타 공연 등 다양한 퓨전국악이 전 세계에서 공연되고 있다. 하지만 퓨전국악의 흐름 속에서 우리의 정서를 오롯이 담아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잇따르고 있다. 우리 민족의 정서를 지키는 동시에 현대화의 흐름에 발맞춰 나가는 국악의 앞날을 기대해본다.

오승현 기자 ohsh2@hgu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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