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전 행각에서 듣는 조선 왕실의 소설



덕수궁은 역사 속 왕족의 사가로 시작돼 행궁을 거쳐 궁궐 역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사적 배경을 지닌 곳이다. 선조가 임진왜란으로 피신을 갔다가 서울로 돌아와 거처한 곳이기도 했으며 인목대비가 유폐된 곳이자 인조가 즉위한 궁이었다. 이렇듯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덕수궁이 이번에는 한국 현대 미술가들의 작품들과 함께 새롭게 문을 열었다.



크롬 형식의 좌식 의자가 설치된 덕흥전



궁, 역사가 살아나는 곳


덕수궁 프로젝트는 ▲함녕전 ▲덕흥전 ▲중화전 ▲석어당 ▲정관헌 등 전각과 후원에서 총 9개의 작업이 이뤄진 예술 프로젝트다. 함녕전은 고종의 침전으로 그의 기운이 가장 많이 묻어있는 은밀한 공간이다. 이곳에 작가 서도호는 정갈하고 차분한 느낌의 보료*를 깔아 명성황후와 엄비를 잃은 후 항상 ‘보료 3채’를 깔고 잤다는 고종의 쓸쓸함을 형상화하였다. 일제시대라는 국가 존망의 위기 상황에서 살았던 고종의 내적 갈 등과 불안의 심리가 느껴졌다.



보료 3채가 깔려있는 함녕전



함녕전 입구의 오른쪽으로 햇살을 따라가면 가구 디자이너 하지훈이 선보이는 덕흥전이 있다. 이곳은 명성황후의 신주를 모시는 혼전인 ‘경호전’이 있던 곳으로 한일 병합 후 일본인 통치자 접견 장소로 변형되면서 화려한 내부장식으로 바뀌었다. 바닥의 크롬 모양의 좌식 의자는 높이가 다른 두 개의 언덕모양으로, 실내의 우아하고도 화려한 장식이 햇빛에 불규칙적으로 반사돼 빨려 들어갈 것 같이 반짝인다. 사운드 아티스트 성기완의 음악을 들으며 의자에 앉아 있으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듯한 오묘한 기분에 휩싸인다.



궁궐 여인들의 비극적 운명을 표현한 <눈물>



궁, 오감으로 느끼다


이번 덕수궁 프로젝트는 전시된 작품들뿐만 아니라 여러 예술공연을 볼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고종황제가 커피를 즐겨 마신 곳이라는 정관헌은 러시아인 건축가 세레딘 사바친이 서양의 발코니와 한국의 정자를 결합하여 양식과 한식의 미가 이국적으로 어우러진 곳이다.


작가 정서영은 이곳에 “지나가는 김씨를 붙들고 알리지 않은 휴식에 관해 이야기하라”라는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은 한 명의 퍼포머(performer)를 세워놓아 현대적 행위예술을 선보였다. 정관헌에서 돌담을 따라 걸어 쪽문 안으로 가면 흐드러지게 핀 나무 앞, 덕수궁의 시원을 이루는 오랜 역사를 지닌 석어당이 나온다. 작가 이수경은 석어당에 덕수궁에 머물렀던 사람들의 비극적 운명을 상징하는 <눈물>을 설치했다. 이 작품은 수천 개의 LED조명으로 구성돼 마치 눈물 한 방울이 응결된 듯한 느낌을 준다. 슬프지만 아름다운 궁궐 속 여인들의 삶을 표현한 작가의 노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빈 정관헌에서 행위예술을 하는 연기자



석어당에서 중화전을 지나 임금만이 걸을 수 있다는 어도를 따라 걸으면 왼쪽 골목에 안쓰럽게 남아있는 중화전 행각에서 예술가 성기완의 작품세계를 만날 수 있다. 시인이자 음악가, 사운드를 채집하는 성기완은 중화전 행각에서 전문 아나운서의 목소리로 녹음된 조선왕실의 소설 중 <화문록>, <천수석>의 흥미진진한 대목을 들을 수 있게 연출해 놓았다. 조그만 전각에서 나오는 소설을 들으며 관객은 마치 조상의 은밀한 생활을 엿보는 기분을 체험할 수 있다.


이번 프로젝트를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오전부터 찾아와 줄을 이었다. 덕수궁 프로젝트는 덕수궁과 덕수궁 미술관에 걸쳐서 전시되고 있으며, 미술관 내부의 작품들은 오는 28일까지, 덕수궁 전각에 설치된 작품들은 12월 2일까지 이어진다. 오후 9시까지 개장돼 낮과밤 각각의 매력이 있다. 자세한 사항은 덕수궁 홈페이지(www.deoksugung.g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행궁: 임금이 궁 밖으로 행차할 때 임시로 머물던 별궁

*보료: 솜이나 짐승의 털로 속을 넣고, 천으로 겉을 싸서 선을 두르고 곱게 꾸며, 앉는 자리에 늘 깔아 두는 두툼하게 만든 요



김지혜 기자 kimjh@hgu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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