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 2일 전라남도 보성기행 맛보기

아주 멀리까지 가면 누굴 만날지, 아주 높이까지 오르면 무엇이 보일지 궁금한 것이 인지상정. 전라남도 보성군에 본지 기자가 사진기자와 함께 다녀왔다. 김동률의 <출발> 노랫말처럼 언덕을 넘어 숲길을 헤치고, 가벼운 발걸음 닿는 대로 걸어간 여행을 느껴보고 싶다면 기자와 함께 여행 속으로 떠나보자.

녹색의 땅, 전남을 향해

우리나라에서 경상도와 전라도가 제일 멀다더니 택시, 지하철 그리고 버스… 교통수단이라는 교통수단은 다 동원해 출발 6시간 만에 벌교에 도착했다. 벌교터미널에서 몇 발걸음을 떼자 눈앞에 ‘조정래 길’ 표지판이 보인다. 벌교는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주 무대이다. <태백산맥>은 여순사건이 있었던 1948년 벌교 포구를 배경으로 우리 민족이 겪었던 수난과 분단의 아픔을 조명하는 장편 대하소설이다. 벌교 곳곳에 살아 숨쉬는 소설 속 현장을 찾아다니다 보니 <태백산맥>을 완독하고 오지 못한 것이 매우 아쉬웠다. <태백산맥>을 끝까지 정독하고 꼭 다시 한번 찾아오리라 마음을 먹었다.

지나가는 차 한 대 없이 한적한 시골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콘크리트 다리가 하나 나온다. ‘부용교’라는 정식 이름이 있지만,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소화다리’라고 부른다. 실제로 소화다리에는 일제시대부터 6·25전쟁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이 겪은 수난과 아픈 역사가 서려 있다.

"소화다리 아래 갯물에고 갯바닥에고 시체가 질펀허니 널렸는디 아이고메 인자 징혀서 더 못보겠구먼이라. 사람 쥑이는 거 날이 날마동 보자니께 환장허겄구먼요" -태백산맥 1권 66쪽

다리 위에서 벌인 좌우익 간 이념 갈등, 처참한 총살형 그리고 강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를 상상하며 내려다본 마른 강가엔 뚱뚱한 오리들이 삼삼오오 모여있었고 다리 위로는 아빠의 허리춤을 꼭 잡은 어린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다. 평화롭고 정겹기만 한 이곳에 이제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가 스쳐 지나가 마음이 착잡해졌다.

벌교천을 따라 반대 방향으로 다시 내려오면 시간이 멈춰있는 듯한 ‘태백산맥 문학거리’를 만날 수 있다. 좋은 사진을 찍고 못 찍고는 얼마나 많이 걷느냐에 달려있다며 묵묵히 앞장서는 사진기자를 뒤따라 걷다 보니 배고픔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벌교에 와서 꼬막을 먹지 않고 그냥 가면 평생 후회한다’는 옛말이 있을 정도로 벌교 하면 단연 ‘꼬막’이 떠오른다. 손님을 유혹하는 화려한 문구 하나 없이 심드렁히 문학거리를 지키고 있던 ‘국일식당’에 끌려 식당 안에 들어섰다.

자리를 잡고 꼬막정식 2인분을 주문하자 상다리가 부러질 것 같이 스무 개가 넘는 반찬이 끊임없이 나왔다. <태백산맥> 속 표현처럼 ‘물기가 반드르르 도는’ 삶은 참꼬막,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꼬막무침, 바삭바삭 입에서 녹는 꼬막부침개 그리고 주인장의 깊은 손맛이 느껴지는 꼬막된장찌개…. 알큰하면서도 담백한 꼬막무침에 아삭한 봄나물을 비벼 밥 네 공기를 ‘흡입’했다. 불과 십여 분 전까지만 해도 걷기 힘들다고 투덜대던 기자의 모습은 젓가락질 몇 번에 사라졌다. 눈으로 보고 놀라고 입으로 먹고 또 놀라는 맛이다.

숨도 차고 가슴도 벅차는 녹차밭

오후 내내 다리를 혹사시켜 피곤했던 터라 버스에 타자마자 35분 동안 고개춤만 연신 추다가 보성에 도착했다. 사진기자와 새벽 4시 기상을 약속하고 녹차밭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몸을 뒤척이다 곤히 잠들었다.

새벽 4시 50분, 모두가 잠든 시간 콜택시를 타고 녹차밭으로 향했다.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170여만 평의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는 대한다원이다. 국내 최대의 녹차 재배지로 사시사철 푸르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5월에는 매년 보성녹차대축제가 열린다. 우거진 숲 속에 굽이치는 곡선을 보고 있으면 꼭 내 몸에 녹색 피가 흐르는 것 같다. 차밭 꼭대기에 올라가 일출을 기다렸다. 5시 40분경 물결치는 초록빛 바다와 안개 낀 하늘 위로 불그스름한 해가 빼꼼히 모습을 드러냈다. 연무빛 녹차밭 위로 쏟아지는 주홍빛 아침 햇살이 어우러지는 절경은 직접 보지 않고서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차밭 전망대에서 일출을 보고 막 내려오자 사진기자가 이제 가장 높은 바다전망대까지 올라가자고 한다. 꼭대기까지 두 번을 오르내리느라 숨이 찼지만 무심코 뒤돌아 본 어깨 위로 펼쳐져 있는 장관에 가슴도 벅찼다. 숲인지 바다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눈 앞에 자욱한 안개가 얹혀 아름답고 평온하기만 하다. 편백나무 산책로를 따라 다시 내려오며 흐르는 폭포수에 세수도 하고 물도 마신다. 그렇게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자연 속에 심취해 있다가 시원한 녹차아이스크림을 먹고 대한다원을 나섰다. 기대 이상이었다. 대한다원에서 나와 10분 정도 걸으면 보이는 봇재다원은 산비탈을 푸르게 장식하며 멀리 보이는 호수를 감싸 안았다. 이곳에는 무료시음장이 있어 자연을 바라보며 녹차를 시음할 수 있다. 5월 상순에 따는 찻잎 세작을 1분 정도 우려낸 녹차는 참 은은하면서도 깊은 맛이었다. 학기 중 묵은 스트레스가 다 씻기는 듯한 느낌으로 녹차밭 여행을 마무리했다.

전날 아침 6시에 학교에서 출발했던 기자와 사진기자는 다음 날 저녁 6시에 학교에 도착했다. 정확히 36시간. 고작 이틀이었지만 어색하면서도 설레는 학기 첫 날처럼 느껴졌다. 새로운 풍경에 가슴이 뛰길 원한다면, 다시 한 번 새 학기를 출발하는 기분을 느껴보고 싶다면 5월의 낙원으로 떠나길 권한다.

권세경 기자 kwonsk@hgu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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