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친구와의 대화에서 그 친구가 한동을 한국 교계(敎界)의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았다. ‘한동’이라는 학교의 대외적 이미지를 확인한 순간이었다. 지난 10년간 한동은 ‘하나님의 대학’이라는 ‘구체 형상’의 태동을 위해 힘들게 달려왔다. 그런데 현 지점에서 한동은 숨 돌릴 새도 없이 앞으로의 10년을 바라보아야만 한다. ‘기독교 학교’라는 정체성의 유지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기독교란 무엇이냐?’에 대한 정의(定意)와 그에 따른 이상(理想)이 높을수록 그에 비례하여 정체성 유지는 어려워진다. 지난 10년 동안 ‘이상’을 앞에 놓고 달려온 한동은 여기서 또 질문해야 한다: “앞으로 10년 한동은 여전히 같은 높이의 이상과 함께 또 하나의 장(章)을 써 나갈 수 있는가?”

이미 전철을 밟은 기독교 학교들을 보자. 어떤 이상적(理想的)적 비전에서 출발한 그 대학들은 열정으로 ‘한 동안’ 기대치를 유지하다가 어느 지점에서 ‘이상’은 ‘타협된 이상’이 되고 ‘높은 목표’는 꿈이 빠진 ‘낮은 목표’가 되었다. 애초의 ‘목표’나 '비전‘은 이제 아련한 추억일 뿐이다. 이 이슈(issue)는 이제 한동의 현실적인 이슈이다. 한 언덕을 넘은 마라톤 선수가 숨을 몰아 쉬며 잠시 서서 다음 고개를 바라보듯이 말이다. ‘목표’와 비전 없이 미래도 없다. 목표는 단순히 미래에만 있는 추상적 구름이 아니고 지금의 주체(한동)를 형성하는 실제적 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히 11:1).

모든 ‘기독교 학교’가 직면하듯 앞으로의 10년을 바라보는 한동도 ‘다양성(diversity)’의 문제가 도전이다. 한동의 특수한 다양성은 여러 심층에 존재한다. 교수와 교직원, 기독학생들과 비기독 학생들, 외국인 학생들과 교수들, 실무자들과 비실무자들, 같은 신앙인들 사이의 신앙적 색채 차이. 다양성 그 자체는 창조된 모든 공동체들의 ‘주어진’ 특성이다. 다양성은 그 자체로 하나님이 주신 다이나믹(dynamic)이다.

중요한 것은 다양성을 주신 하나님은 그것을 통한 의미 있는 조화(harmony)와 긍정적 연합(unity)을 원하신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말하는 ‘지체들과 머리(그리스도)’사이의 유기적 관계 이야기이다(엡 4:16). 다양한 지체들은 ‘머리’ 안에서 창조적인 연합을 이루어야 한다(롬 12:4). 어느 공동체에게나 다양성은 ‘잠재적 자원(asset)’이거나 ‘잠재적 파괴성(destructiveness)’이다. 그래서 자원(asset)은 항상 책임(liability)을 내포한다. 다양성은 일단 ‘서로 다르다’는 조건이기에 경계와 불신과 분리의 요인이 쉽게 된다. 그러나 지체들이 서로가 서로의 가치와 권리와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면, 그래서 서로 허물기 보다는 세워줄 수 있게 되면 다양성은 갑자기 효율적 자원이 되어 공동체를 더 재미롭고 더 생산적이며 더 창조적인 장으로 만드는 요인이 된다.

요사이 우리는 비기독인 학생들이 자신들에 대한 좀더 주의 깊은 관심을 요구하는 ‘작은 목소리’를 발하는 것을 듣는다. 그런가 하면 학교 측은 각고의 고난으로 이 지점까지 온 지금의 ‘한동이라는 정체성’을 이해해 주기를 호소한다. 그런가하면 학교 직원들과 교수들 사이에서 서로 ‘상대가 나를 좀 더 이해해 주었으면’하는 바람들이 있다. 이러한 모든 목소리들은 어떤 분명한 고통과 사정들을 반영한다. 이런 현상은 물론 한동만의 것은 아니다. 다양성을 지닌 어떤 공동체에든 존재하는 문제이다. 질문은 이런 상황에서 한동이라는 공동체안의 지체들이 서로가 서로를 향해 열수 있느냐이다. ‘나’와 ‘너’를 초월한 더 큰 대의(cause)를 서로가 바라보며 그 안에서 연합(unity)의 가치를 긍정할 수 있느냐이다. 목사인 나로서 그 ‘더 큰 대의’는 사도바울이 말해준 것이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김형겸 목사 (교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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