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속한 475 세대들은 “이 몇 년을 없는 듯 생각하라”는 충고를 자주 들으며 자랐다. 좋은 상급 학교 진학을 위해, 혹은 고시와 취직 시험을 위해 몇 년을 없는 셈치고 살도록 강요 받았다. 그것이 우리 세대의 성공 방식이었다. 우리는 그 통념에 아무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그것을 잡으려는 일념으로 달려왔다. 그 결과, 소수는 “잡았다!”고 소리치며 인생을 누리고 있고, 다수는 지쳐 넘어질 듯한 걸음으로 계속 좇고 있고, 다른 소수는 실패를 선언하고 대열에서 벗어나 버렸다. 그러는 동안 교회는 소수의 ‘성공 인생’에 속하는 신앙적 비결을 전수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경주에서 승리하도록 부추겼다. 피 말리는 경쟁 사회에서 남들에게 없는 ‘비밀 병기’를 제공해 주는 곳이 교회였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으나, 우리 세대는 성공에 대한 잘못된 통념의 처절한 희생자들이다. 성공의 축배를 터뜨린 사람들도 희생자이긴 마찬가지다. 굳이 전도서의 한 구절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누리는 행복이라는 것이 사실은 ‘행복으로 위장된 불행’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 불행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몫을 정의의 이름으로 점유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까지 불행하게 만든다. 예수께서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눅 6:24)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참된 성공이란 무엇인가? 해바라기의 성공은 꽃을 피우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씨앗으로 시작하여 다시 씨앗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매 순간 자신의 삶에 충실하는 데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성공은 어떤 업적을 이루거나 어떤 지위에 오르는 것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태아로부터 시작하여 목숨을 마칠 때까지 매 순간 가장 인간다운(보편적 소명), 그리고 가장 자신다운 삶(개인적 소명)에 충실하게 사는 데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연합되어 그분의 은총으로 인간다움을 회복하고 자신의 부름을 확인하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다.

대학은 모름지기 이 자기 발견, 자기 회복의 과정을 추구하고 실험하고 성숙시켜 가는 구도적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특히 기독교 대학은 세속적 성공을 성취시키는 특별한 방법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얼마나 참된 삶으로 인도하느냐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학문은 그 구도적 삶의 과정이며 열매여야 한다. 한 사람의 학문과 인격이 별개일 수 있다는 서구적 사고를 더 이상 따라서는 안 된다.

진정한 성공을 묻는 사람이라면 지금 자신의 삶을 통해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성공이란 속임수에 불과하다. 대학생, 특히 예수님의 제자를 자처하는 대학생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거친 야망을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라고 믿고 맹렬하게 추진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가만히 머물러 자기 발견과 회복의 과정을 진지하게 밟아가고 실천해 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곳을 향해 용감히, 부단히 나아가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정성을 다하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참된 성공이다. 우리 사회에게 정말 필요한 사람들은 번쩍거리는 스타가 아니라 묵묵히 자신의 몫을 다하며 살아가는 구도자들이다. 우리 세대가 그 동안 추구해 온 성공은 말 그대로 신화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인은 신화가 아니라 진리를 좇는 사람들이 아니던가!

김영봉 목사 (전 협성대 교수, 미국 벨미연합감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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