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에서는 저를 모난 돌로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냈습니다. ‘당신들 눈에는 내가 모난 돌로 보이지만 나는 모난 돌이 아니고 모난 원석이다. 맞으면 맞을수록 빛이 나는 누구나 갖고 싶어하는 다이아몬드다.’이런 슬로건 하에 스스로 노력했고 압력이나 청탁을 뿌리치면서 지금까지 견뎌왔습니다. 웬만한 사람 같았으면 아마 몇 번이고 집에 돌아갔을 겁니다. 그러나 굳건히 지키고 무탈하게 젊음을 한동대학교에 놔두고 집에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게 모두 다 여러분 덕인 것 같습니다. ”

 

지난 6월 15일 손양원 RC 채플에서 특별한 은퇴식이 열렸다. 28년간 학교에서 교직원으로 일한 이종만 생활관 운영팀장의 은퇴식. 눈시울을 붉히며 담담하게 꺼내는 그의 말에서 곧고 맑은 힘이 전해져 왔다. 허공에 날아가는 말이 아니라 듣는 이의 마음 밭에 심어지는 말, 그 짧은 말 속에 그의 한동이 오롯이 담겨있었다. 한동대에서 ‘57학기’ 동안 ‘모난 원석’으로 일해온 그에게 한동대는 어떤 곳이었을까. 그가 한동대에서 고군분투하며 지키려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지난 8월 31일 정년퇴직한 이종만 생활관 운영팀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Q.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한동대에서 57학기를 마치고 졸업한 이종만입니다. 94년 2월 15일부터 총 23년을 시설관리팀에서 근무하다가 하용조관이 거의 다 준공이 되어갈 무렵 일이 있어서 2016년도 10월 18일에 생활관으로 근무지를 옮겨서 생활관 팀장으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올해 8월에 퇴직을 한 이후 지금은 학교에서 수도요금과 관련한 일을 하면서 터득한 예산 절감 방안을 토대로 전국에서 유일한 전문 컨설팅 법인을 만들어서 사업하고 있습니다. 

 

Q. 한동대에 와서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포항제철에서 퇴직하고 중소기업의 안전관리책임자로 근무하던 중 일간지 구인 광고를 보고 한동대에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건축물을 건설하는 단계에서 기계 설비 공사를 관리 감독하는 직종의 직원을 채용하는 공개채용 1기 기능직으로 입사했어요. 

학교에 들어온 당시에는 학력, 어학능력 등 내세울 만한 게 없었어요. 한동대에 입사한 이후 학교에서 필요로 하는 안전관리 분야에 관련된 국가 기능 자격증을 선임하면서 직접 안전관리를 하기 시작했죠. 나는 대학교육 협의회와 한국 사학진흥재단 같은 기관에 전문가 과정에서 발표하는 수준이 되도록 업무 능력을 꾸준히 계발해 왔습니다. 즐기면서, 주도적으로 일하다 보니 이런 결과가 나왔습니다. 스스로 노력하여 전문가가 되었다는 자부심이 있어요. 나는 늘 ‘내 머리는 나쁜 편이다’하고 말을 해요. 나쁜 머리를 노력으로 때웠어요. 집념을 가지고 어떤 일이든 달성한다는 거죠. 그게 습관이 되니까 안되는 게 없는 거예요.

여담으로, 나는 한동대에 공채 1기 즉, 9급 기능직으로 들어왔는데 1년 정도 일을 하고 나니  기술직으로 전환해 주더라고요. 5년 정도 차이가 나는 과장들이 있었으니 그렇게 빨리 팀장이 될 줄 몰랐어요. 전임 윗분들이 자리를 옮기면서 빨리 팀장이 될 수 있었죠. 나는 업무를 진행하면서 공정한 관리를 위해 노력했으며 내·외부로부터의 어떠한 압력이나 청탁도 다 거부했어요. 누군가 나에게 ‘저 업체 써라’, 하면 나는 늘‘아니요, 경쟁 붙이겠습니다’ 했으니까요. 

당연히 할 업무를 누구의 청탁이나 부정한 방법을 취하지 않고 정직하게 일하는 것은 조직 내에서 쉽지 않은 일이죠. 일반적으로 당연하다는 표현들을 쉽게 하는데 사실과는 거리가 멀어요. 업무를 하다 보면 학연, 지연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압박이 들어와요. 나는 그 압박에 굴하지 않으니 근무평가서에 상사의 말을 안 듣는다고 평가해서 낙인을 찍죠.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내가 진짜로 상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줄 알아요. 실제로는 일을 엄청나게 열심히 했는데,  특히 나에 대한 부서 내 직원들의 평가는 늘 최하점이 나왔죠. 

 

Q.   정년 퇴직하기 전 한동대에서 어떤 일들을 맡아 해오셨나요? 

먼저 나는 23년간 시설관리팀과 건설관리실에서 일했습니다. 시설관리팀은 공사부터 시작해서 기계 설비, 시설 유지 관리 같은 일을 맡아서 하죠. 남들이 쉴 때 우리는 시설을 수리해 두어야 해요. 처음에는 시설관리와 건설부서가 따로 있었어요. 초창기에는 시설에서 공사를 다 했고, 개교 이후인 96년도부터는 건설 분야가 따로 생겼어요. 이후 저는 시설에 관련되는 일을 중점적으로 했어요. 안전관리와 기계 설비에 관한 업무를 도맡아 하면서 학교 시설을 총괄했죠. 일을 하기 위해 건물을 유지 및 관리하는 것에 필요한 자격증 8개, 운전면허증도 2개도 땄고요. 자격증만 있고 일을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자격과 일의 일치, 즉 이론과 실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기술자는 능동적으로 움직여야 해요. 그런데 대부분은 시키는 것도 안 해요. 나는 남들보다 출근을 1시간 정도 빨리했어요. 8시에 출근해서 동력실에 가는 거예요. 동력실 화이트 보드에 난방, 급탕 온도를 몇 도에 맞추어 놓았는지, 이렇게 매일 호관 별로 설정 상태를 확인하죠. 외부에 온도계를 달아 놓고, ‘오늘 외기 온도가 이러니까 난방을 몇 도, 온수를 몇 도로 맞춰야겠다’ 예측하고 항상 가변을 하도로 동력실 근무자에게 시켰어요. 가변한다는 것은 예민하게 한다는 것이고, 예민하게 한다는 것은 가스비를 절감한다는 거예요. 내가 시설에서 나온 이후로 가스비가 엄청나게 많이 들어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제가 한동대에 있을때 전체 가스비만 연간 2억 5천을 아꼈거든요. 

온수 급탕기인 CO2 급탕기도 우리 학교에 가장 많이 설치되어 있어요. 다른 학교들은 겁나서 못하죠. 몇억씩 들어가는 설비이기 때문에 만약 일이 잘못되면 문책을 당할까 봐 섣불리 결정을 못 합니다. 내가 동력실 없이 난방과 급탕을 할 수 있는 방법을 검토하여 보고하니 총장님께서 매우 흡족해 하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우여곡절 끝에 수의계약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고 우리 학교 생활관에 다른 설비보다 효율이 월등한 CO2 급탕기 설비를 오히려 저렴하게 설치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 엔지니어가 들어오면 가장 먼저 우리 학교부터 우선 무상으로 전부 점검을 합니다. 해당 제조회사에서 모니터링을 하고, 전 세계에 배포되는 종합 카탈로그에 우리 학교가 소개되어 있고요. 그런 것에 자부심 있어요. 연료비를 대폭 절감하고, 고장이 나지 않으니까 인건비도 줄일 수 있게 된 것이죠. CO2 급탕기를 반영하면서 24시간 온수 공급이 2015년 3월 20일부터 되기 시작했어요. 그전까지는 생활관 샤워실에 찬물이 나왔다가 더운물이 나왔다가 했어요. 

보통 사람들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싫어서, 혹은 내 돈이 아니니까 관심을 두지 않고  지나치는 일들이 많죠. 지진이 나고 하용조관 엘리베이터가 변형되어서 멈췄어요. 그 당시 나는 사실 하용조관 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됐어요. 행복관은 생활관 관리 대상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엘리베이터 수리가 늦어져 학생들이 불편을 겪게 되는 거예요. 정상적인 절차에 따르면 1개월 이상 소요되는 상황이었죠. 결국    대형건설사(화성산업주식회사)인 시공업체에 부탁하여  수리 일정을 앞당길 수 있었습니다. 화성산업이라는 일군업체는 100대 기업에 들어가는 (영향력 있는) 업체이기 때문에, 제조회사가 시공건설사의 요청을 뿌리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엘리베이터 수리 공사를 관리하는데, 가만히 현장을 보니 인부가 부품을 한 차 싣고 왔다가 도로 가져가더라고요. 다 가져가고 나서 청구서가 들어왔는데 쓰지 않은 부품도 교체한 것으로 청구한 거예요. 이게 사실이면 사진 대조 가져와라, 했죠. 사진을 첨부하게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업체에서 급조한 사진 대조표를 만들어서 가져오는 등 계속해서 조작된 자료를 가져오는 거야. 그래서 나는 생활관 팀장이 아니라 건설에서만 23년 한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서류 책임자 내려오라고 해라, 아니면 피디 수첩에 보내 버린다, 하고 말하니까 겁이 나서 책임자가 (자료를 조작한 것을) 인정하더라고요. 이후  본사 정밀점검팀을 붙여서 안전점검을 하고, 수리비용을 청구하라고 했어요. 실제로 공사에 사용된 부품 값을 보니까 380만 원 이더라고요. 내가 학교에 2,920만 원을 그대로 다 돌려준 셈입니다. 

 

Q. 팀장님께서 한동대에 일어난 위기 및 재난 상황 대처에 큰 역할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는 위기 상황에서 최초 발견자는 최초 지휘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 자신이 그렇게 살아왔고, 학생들에게도 그렇게 안전 교육을 했습니다. 기숙사는 되도록 옥내소화전 밑에 소화기가 법적으로 1대만 있으면 돼요. 그런데 우리 학교 생활관에는 다 2대씩 있어요. 내가 다 그렇게 한 거예요. 소방서에 신고를 해서 출동을 하면 최소 15분에서 20분은 걸려요. 그런데 불이 난 지 11분이 지나면 전성기가 와서 불이 확 번져요. 소방서에서 출동하기 전에 확산이 된다는 거예요. 나는 포항 제철에 근무할 때부터 안전관리자를 하면서 교육을 계속 받았기 때문에 (소화기를 2대씩 배치하는 것 등을) 현장에 도입할 수 있었던 거예요. 다른 사람보다 안전에 민감하니 몸이 자동으로 반응했던 거죠. 다른 사람들은 구경하기 바쁠 때 우리는 최초 지휘자가 되는 거예요. 지휘해가면서 조치도 하는 거죠. 

태풍은 한동대에 매년 1년에 한 두 번씩 꼭 지나갔어요. 김영길 총장님은 외국에 출장 중이다가도 태풍이 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다른 사람한테 연락해서는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셨는지 내 휴대폰으로 바로 전화를 주셔서 “걱정이 되어서 전화했어.” 하셨어요. 그러면 “저희가 비상근무하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볼일 보고 오세요.” 하면 총장님이 “그래. 믿어~.” 하고 전화를 끊으셨어요. 매년 태풍이 올 때마다 남들은 세 시 되면 집에 못 간다고 다 퇴근을 하는데 우리는 비상근무를 하는 것이 당연한 거예요. 시설관리팀은 전체적으로 비상근무를 하면서, 2시간 또는  1시간마다 순찰을 하면서 막힌 것이 있으면 낙엽 같은 거 빼내고, 물이 잠기는 곳이 있나 없나를 다 파악하면서 돌아다니는 거예요. 그래서 큰 안전사고 없이 다 넘어갔죠. 나는 그런 것에 대해서 누구한테 생색낸 적도 없고 잘했다고 표창을 받아본 적도 없어요. 그런데 그것에 대한 아쉬움이 나중에 남더라고요. (내가 한 일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한동대 구성원으로서 주인의식을 가지도록 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들은 누가 와서 이 일들을 했는지 모르는 거예요. 학교는 무사한데, 누가 무사하도록 했는지는 모르는 거지. 나는 생색을 내지 않았죠. 그런데 조용하면 사람들이 일하지 않는 줄 알아요. 시설은 아니에요. 제대로 하면 엄청나게 바쁜데,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표가 안나요. 아는 사람들이 봐야 표가 나죠. 

2017년도 포항에 지진이 났을 때도 그랬죠. 지진이 흔들고 간 건물에 누가 들어가나요, 못 들어가죠. 그런데 나하고 조원철 학생처장, 정상모 교수는 학교 전 호관에 들어가 안전점검을 하고 학생들이 짐을 챙겨서 건물 밖으로 나오게 했어요. 

  

Q. 생활관으로 근무지를 옮긴 이후 어떤 일을 하셨나요?

시설에서 일한 것이 있기 때문에 생활관에 낙후되어 있던 것들이 눈에 띄더라고요. 생활관 출입문 오버 센서, 소파 패브릭같이 낡은 것을 다 교체했어요. 학생들에게 안내 띄우고 공지 붙여 놓고 바로 수리를 시작했죠. 원클릭 제도가 처음에 갔을 때는 민원이 70건 이상 밀려 있었어요. 자치회와 상의해서, ‘밀려 있는 민원은 삭제하고 불편한 것이 있으면 다시 올리라고 하는 대신 한나절 안에 민원을 해결하는 것’을 원칙으로 민원 체계를 다시 만들었죠. 위기나 안전에 관한 프로토콜도 전부 수정했어요. 이렇게 생활관에 가서 40여 가지 제도를 바꿨어요. 간사들도 임시직에서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는 데 작은 힘을 보냈어요. 참 보람이 있어요. 생활관 직원들이 영원한 팀장님이라는 소리를 지금도 한다니까. 그러면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하죠. 지금 팀장이 기분 나쁠 수 있다고.  

생활관에서 못다 한 일은 엘리베이터 설치예요. 나는 생활관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것을 5년 동안 준비했어요. 생활관에 오자마자 대외협력기금, 목적기부금을 받아서 예산을 확보한 다음에 빨리 설계부터 하자고 했어요. 설계 사무소에서 정보를 받아서 바로 문서를 만들었죠. 그리고 그 문서를 토대로 매번 교무부 회의 때마다 0순위, 1순위로 엘리베이터 안건을 올렸어요. 총학생회장, 자치회장에게도 총장님, 이사장을 찾아가서 엘리베이터 이야기를 하라고 했죠. 구두 보고만 되고 정식 안건으로 올라가지는 못했어요. 그러다 작년 12월 23일, 내가 RC 관련한 사안으로 신임 총장과 이사장에게 보고할 일이 있어서 서울에 올라가게 되었어요. 신임 총장과 이사장 앞에서 “생활관 시설에 대해 설명을 하겠습니다. 우리 학교가 개교 이래 한 번도 예산이 풍요로워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건물도 하나씩, 설비도 하나씩 만들어서 지금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아직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이 4개나 있습니다.”하고 말씀을 드렸죠. 그러니까 이사장님이 깜짝 놀라시면서 흔쾌히 엘리베이터 설치예산 확보해 주셨어요. 그런데 엘리베이터는 준공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가동을 하지 못하고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엘리베이터 가동과 관련된 문제는 단순 공정이라 계약대로 9월 20일 정도에 끝낼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운 마음이 많이 남습니다.

 

 

Q. 팀장님의 말씀에서 ‘학생 중심’이자 동시에 ‘직원 중심’으로 일을 해오신 것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직원들은 누구 때문에 여기에 있나요. 학교 안에 있는 직원들 모두는 소속 관계없이 모두가 학생들 때문에 여기 한동대에 와 있고, 학생들 덕분에 노력에 의한 대가를 받고 있는 것이지요. 학생들은 잘못하면 용서를 해주어야 하고, 직원들과 종사자들이 잘못하면 그것에 대한 처벌을 받아야 해요. 이 부분을 명확히 해야죠. 사람들이 구조를 이야기할 때 피라미드 구조를 이야기하지만, 나는 역피라미드가 맞다고 생각해요. 밑에서 튼튼하게 받쳐주어야 한다는 거죠. 혹시나 놓치는 것도 모아서 챙겨줄 것이 있는지 살피기 시작하면 진짜 편해지죠. 다 내 편이 되니까. 숨기는 것이 없고 오히려 다 털어놓게 되더라고요.

젊을 때 들었던 말 ‘베풀 수 있을 때 베풀어라. 자기 위치에서.’ 이 말이 정말 좋은 거예요. 내가 겪었던 많은 어려움을 도움으로 승화시키려고 애썼어요. 내가 피해받은 만큼 남은 피해를 받지 않도록 챙겨줬어요. 직원들의 대변인 역할을 많이 했죠. 나는 학교로부터 철저하게 배제된 사람이기 때문에, 절실하게 나 같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사람들이 도움을 청할 때 그 문제를 해결해 주고 도움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Q. 한동대에서 일하시면서 수많은 변화를 만들어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나요? 변화는 어디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모든 일은 한 사람으로부터 출발하죠. 전체에게 내가 기획하고 진행하고 있는 일을 주입하려고 하면 가장 먼저 내 옆에 있는 사람부터 먼저 변화시켜야 할 것 아닙니까. 일단 전체의 50 퍼센트를 변화시키는 것에는 시간이 엄청 걸려요. 그러나 50%까지 가는 것에 시간이 한 달이 걸리면 그럼 나머지 45%는 또다시 한 달이 걸리겠느냐, 그건 아니라는 거죠. 이건 하루 만에 도달할 수도 있어요. 바뀐 50%의 사람들이 역할을 하게 되기 때문이죠. 그러니 안된다는 소리를 하지 말고 도전하라는 거죠. 나는 항상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이보다 더 큰 일이 날 것을 이 정도에서 막았으니 다행이다, 하고 생각하고는 해요. 그 생각이 나에게는 큰 위안이 돼요. 나는 사고가 나기 전까지는 계속 잔소리를 하고 사고가 나면 오히려 보호자가 되어 줘요. 그래야 나에게 숨기지 않으니까.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반대로 할 걸요? 

내가 한동대에서 불의에 타협하지 않으려고 애쓴 이유를 거창하게 말하면 ‘정의를 위해서’라고 볼 수 있어요.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요. 사람들이 모른다는 이유로 손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알고 있는 사람은 알고 있는 만큼 변화를 주어야 하죠. 

과거 현재 미래를 비교하라고 하잖아요. 가장 가깝게 볼 수 있는 건 어제, 오늘 내일, 조금 전 지금 조금 뒤에요. 이렇게 보면 큰 변화가 없는 것 같아요. 그러나 내가 지금 생각을 하고 어떻게 할까, 생각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10년, 20년이 지나면 생각하지 않고 멍 때리는 사람과 그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벌어진다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지나가고 있어요.

일을 할 때는 결과가 어떻게 될지 예상을 하지만 무작정 불가능하다고 판단을 내리지  말고, 장애물이 나오면 어떻게 극복해서 결과에 도달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해요. 이 장애물은 내 능력으로 극복할 수 없어, 하고 대부분 포기하고 말아요. 그런데 나 같은 스타일은 한번 해보자, 하고 그냥 가는 거예요. 장애물을 만나면 연구를 하는 거죠. 고꾸라지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노하우가 있고, 찾아낼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죠. 법 조문과 시행 규칙을 다 찾아보는 거예요. 법이 왜 만들어졌고, 최종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등을 다 알아보는 거죠. 최소한 계획을 세울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 협조를 어떻게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은 모두 찾아봐야죠.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모른다고 하고 가만히 있고는 하죠. 

일을 즐기면서 하면 얼마나 좋아요. 일은 남들보다 10배 더 하면서도 힘은 들이지 않고 해요. 내가 찾아서 하는 일이니까요. 저는 한동대에서 일하면서 법령을 5개 정도 바꿨어요. 국민신문고에도 수차례 신고를 해서 합당한 조치 혹은 보상을 받았고요 다른 사람들은 내가 일하는 것을 보면서 ‘미친 놈, 저렇게 해서 누가 알아주나’ 했을 거예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내가 성장하면 되는 거죠. 

 

Q. 한동대에서 비기독교인 교직원으로서 일하면서 겪은 일 중 기억에 남는 일이 있나요?

우리 학교는 기독교 정신을 건학이념으로 하고 있어요. 나는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있는 건 아니지만, 업무를 진행하고 진급하는 것에 있어서는 (비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받는) 불이익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교회의 직함을 가지고 학교생활을 하는 직원들이 나의 본보기가 되지는 않았어요. 나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거나, 잘 보이기보다는 내가 맡은 업무를 하는 것에 온 힘을 다했습니다. 

학교는 직원, 교수와 학생 3 주체로 이루어진 집단이에요. 진정한 기독교 정신이었다면 차별이 발생하지 않았어야 하죠. 그러나 직원과 교수의 처우가 확연히 달랐어요. 예시로, 안식년은 교수만이 누리는 특혜이지요. 직원의 처우개선을 이해 평 조합원으로 시작하여 노조 지부장 역할까지 본의 아니게 하게 되었어요. 노조에서 이념이나 정치색은 배제하고 오로지 차별에 대한 완화, 즉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노력했죠. 

처음에 노조는 직원 협의회였어요. 직원들이 신분의 위협을 느껴서 그에 따른 대응을 해야 했고, 노조를 보호 장치로써 만든 것입니다. 그게 96년도에요. 나도 처음엔 신분 보호 차원에서 노동조합에 가입했어요. 내가 강성이라는 소리를 왜 들었겠어요. 나는 보일러, 가스, 냉동기, 위험물 안전관리자로 선임되어 있었어요.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당장 멈추는 것이 많았던 거예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조건이 되니까, 한 때는 내가 자진해서 지부장을 맡았어요. 노조 지부장을 하면서 피해를 많이 봤어요. 건축물신축공사를 잘해서 수고했다는 의미에서 표창을 주는데, 같이 노조를 한 다른 직원은 받아도 나는 노조를 강성으로 했다는 이유로 표창 대상자에서 잘리기도 했죠. 

 

Q. 한동대학교는 팀장님에게 어떤 곳인가요?

인생을 나는 3막으로 분류하고 싶어요. 제1막은 부모님께서 나를 키워 주신 단계, 제2막은 내가 주역이 되어 세상에 적응하면서 바쁘게 보낸 시기, 제3막은 경제활동을 뒤로하고 인생을 즐기며 정리하는 단계로요. 한동대학교는 인생의 제2막을 화려하게 불태운 곳이에요. 

한동대학교는 나에게 엄청난 삶의 기반을 마련한 곳이고, 열정을 불태운 곳이고, 젊음을 바친 곳이라고 봐도 표현이 과하지 않을 것 같아요. 한동대학교는 죽을 때까지 간직하고 갈 것입니다. 그래서 한동대가 기독교 대학으로서 바르게 가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한 가지 기대하는 것은 한동대가 바른길로 갈 수 있도록 모든 한동 구성원들이 정직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일해야 하며, 혹시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직언해야 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Q.한동대 구성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나요?

한동대 구성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한동을 사랑하고 남을 배려하고 베풀며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자’ 그 말을 하고 싶어요. 남들을 밀어주고, 지지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될 수 있으면 솔선수범하고 정직하게 행동하면 좋겠고요.

직원들에게는 자기 역할을 남에게 미루지 말고, 진짜 성의를 다해서 일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거짓으로 다른 사람을 속이지 말고요. 총장이 있으면 직원 기도회에 다 나가고 총장이 없으면 다 빠지고, 이런 행동을 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말은 정직, 정직 하는데 정직하지 않으니까 정직을 더 강조하는 것 같아요. 성실하지 않기 때문에 성실하라고 자꾸 하는 거라고요. 강조할 필요가 없는 부분을 강조하는 것은 이상하지요. (정직과 성실보다) 몸소 솔선수범하는 자세가 더 바람직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가장 당부하고 싶은 말이죠. 올바른 방향으로 솔선수범하면 남들이 따라오지 않는다고 해서 중지하지 말고 끝까지 가라 이거죠. 그러다 보면 뜻이 맞는 사람이 하나둘 붙고, 그런 사람이 많아질 때 그 조직은 살아 움직일 거예요. 그것이 안 된다고 나마저 포기하면 이 조직은 멸문지화할 것이다, 하고 나는 확신해요. 직원들에게 느낀 그대로 동료 직원에 대해서 평가를 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 부분이 가장 아쉬운 부분이에요. 엘리베이터 준공 공사에 관해서도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고 담당자 징계를 하지 않고 있잖아요.  

나부터 변하자. 남에게 요구하지 말고 나부터 바뀌자, 하고 말하고 싶어요. 내가 바뀌면 끝나는 거야. 내가 나를 속이면 안 되잖아요. 내가 정직한 생활을 하면 세상이 바뀌는 거예요. 모든 일은 한 사람으로부터 출발하니까요. 정직이니 뭐니 성실이니 뭐니 하지 말고, 남 따라오는 것 신경 쓰지 말고 내 갈길 가면 찬성하는 사람은 따라올 것이고 싫어하는 사람은 매도할 거예요. 주변 반응에 현혹되어서 하던 일을 중지하지 마세요. 나를 반대하는 1~2퍼센트는 과감히 버려야 해요. 표시 나게 버리면 밑천이 다 보이니까 버릴 카드는 표시가 나지 않게 버리세요. 안 되는 사람은 본인도 주체가 되지 않아 그러는 것인데 내가 그 사람을 변화시킬 필요는 없잖아요. 내가 어떻게 남을 변화시키나요. 

 

 

 

용기 있는 자들이 만들어갈 낯선 ‘한동’

이종만 팀장, 그의 인생에는 한동대의 기존 리더십을 주축으로 쓰인 역사에서 배제되어 온 이야기가 들어있다. 이종만 팀장이 한동대에서 겪은 이야기는 그의 인생 이야기인 동시에 한동대의 또 다른 역사이다. 다르기에 낯설고, 불편하기도 하다. 이종만 팀장의 이야기는 우리가 그동안 주목하지 못한 한동의 반쪽에 시선을 두고, 지금과는 다르게 행동하라고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부터 변하자’는 그의 말에서 확신에 찬 절실함이 묻어져 나오는 것은 그가 모두가 침묵할 때에 용감히 목소리를 내고 현장에서 행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인터뷰를 하면서, 인생의 절반을 바쳐 한동대를 변화시켜 온 이야기를 담담하게 꺼내는 그의 모습 속 인간 이종만이 보이기 시작했다. 단단하고, 투명한. 깨지면 깨지는 대로, 조각난 그대로 꼭 필요한 곳에 자리를 잡는 모난 돌, 이종만. 누군가에게 그는 한없이 모난 돌이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 그는 든든히 기댈 품을 내어준 커다란 바위였다. 이종만이라는 바위가 한동의 주춧돌로서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켰기에 한동은 무탈히 세월을 지나올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영웅을 찾아. 그들의 이야기와 함께 감추어져 있다가 뒤늦게 세상에 드러난 ‘한동’. 조금은 낯선 한동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고, 목소리를 들을 용기가  우리에게 남아 있는가. 용기 있는 자들이 만들어 나갈 한동대를 상상하고, 지지하고, 마침내 그 ‘용기’를 살아낼 때 한동의 품은 더 넓어질 것이다. 한동대가 누구에게나 마음 편히 삶을 펼쳐나갈 터로 거듭날 수 있도록, 오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쓰는 영웅들. 그들이 있기에 한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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