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환경시스템공학부 김주일 교수 
공간환경시스템공학부 김주일 교수 

 

 

 

 

 

 

 

 

세계화가 시작되던 90년대의 대학가는 너무도 다른 두 장면으로 기억된다. 첫 장면은 반세계화 시위이다. ‘FTA가 체결되면 우리나라 농민들 다 죽는다’고 목청 높이던 시위대의 모습을 기억한다. 더 중요한 두 번째 장면은 유럽 곳곳을 누비기 시작하던 당시 대학생들의 모습이다. 반세계화 시위가 무색하게, 방학 때면 수만 명의 대학생들이 배낭을 메고 유럽으로 떠나곤 했다. 당시 유럽 배낭여행은 글로벌 세상으로 가는 입장권이요 통과의례와 같았다. 고색창연한 유럽도시를 거닐고 자유분방한 유러피언의 모습을 보면서 당시 대학생들은 지구촌과의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꿈꾸듯 몇 주를 지내고 김포공항으로 돌아온 그들 모두는 어느새 ‘글로벌리스트’였다. 아이스크림도 첫 한입이 제일 감미로운 것처럼, 글로벌리즘의 첫맛도 이렇게 달콤하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신문에서 읽은 기사는 세상이 바뀌는 충격을 실감하게 했다. 앞으로 해외여행은 아주 희귀한 경험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갑자기 날아든 팬데믹이 일으킨 파문에 영원히 열려있을 것 같던 세계는 다시금 닫혀가고 있고, 첫맛과 달리 씁쓸한 글로벌리즘의 뒷맛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물론 글로벌리즘의 퇴조가 예상치 못한 일인 것은 아니다. 글로벌리즘과 궤를 같이하며 자라가던 테러리즘, 환경문제의 우려가 커져왔지만, 글로벌 경제체계가 가져다주는 이익으로 애써 무마해왔다. 하지만 글로벌 경제체계도 결국 파열음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글로벌리즘 모본이라 할 수 있는 유럽 연합이 분열조짐을 보이고 있고, 가장 뜨거운 파트너십이던 미-중 경제관계도 이제 분쟁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렇게 서서히 퇴장하던 글로벌리즘의 등을 팬데믹이 나타나 세게 떠밀고 있는 격이다.

 

달콤한 기억은 잊고 냉철하게 돌아보면, 글로벌리즘도 결코 유토피아는 아니었다. 개방과 연결이 세계를 평등한 네트워크로 바꾸어줄 것이라는 생각은 사실 착각에 불과했다. 중심부와 주변부는 엄연히 구분되었고 그 격차는 오히려 커져만 갔다. 연결된 경제체계 속에서, 특히 금융과 부동산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거품을 만들어내면서 지구촌 경제를 불안하게 했다. 월가 금융인들이 벌인 장난이 변방의 서민들을 실업자로 만들기도 했고, 글로벌 큰손이 재미로 사들인 주택이 한 나라의 부동산을 양극화로 몰고 가기도 했다. 중심부에서는 거품을 일으켜 이익을 얻고, 그것이 터지는 충격은 고스란히 주변부로 넘기는 몹쓸 흐름이 자리 잡은 것이다. 바이러스 재난도 그렇다. 아프리카의 녹색원숭이, 중국의 박쥐가 있는 줄도 모르던 변방에서 오히려 ‘글로벌’한 피해가 나타나곤 한다. 이런 불합리함에 대해 성찰할 시간도 필요하건만, 그럴 틈도 주지 않고 다시 팬데믹 시대가 닥치고 있다. 팬데믹 파문은 세계를 또 어떤 모습으로 바꿀 것인가. 그리 달갑지 않지만, 들여다보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다.

 

우선 국제관계에 있어서는 다시금 고립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들 한다. 나라들마다 빗장을 걸고 중세 성벽의 시대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방문객을 막기 위해 벚꽃 축제를 취소하고 유채꽃밭도 갈아 없애던 올 봄 우리나라 도시들의 모습이 그런 징조를 보여준다. 고립이 기본이 되고 개방은 제한적으로만 허용되는 그런 세상이 도래할 가능성이 높다. 각 나라와 도시들은 고립과 개방의 이분법 가운데에서 오랜 동안 외줄타기를 해야만 하는 처지가 될 것 같다. 

 

경제차원에서 보면 글로벌 분업이 손상되고 다시금 대립적인 보호무역이 등장할 것이라 한다. 선진국은 과거와 같이 개도국에 생산을 모두 맡길 수 없기에 자연히 자족적이고 내수 중심적인 산업체계로 전환해 갈 것이다. 일자리를 잃는 개도국들로서는 식량과 자원 수출을 무기화하며 대응하게 될지 모른다. 결국 개방경제가 흐트러지고 세계적 공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 바이러스가 일으킨 공황이기에 소득은 물론 건강의 양극화로까지 이어지지 않을까 두렵다.

 

한편 정치적으로는 과도한 포퓰리즘, 통제사회의 등장이 우려되고 있다. 감염을 막는다는 명분하에 각 나라의 감시와 통제가 일반화되면서 전체주의적 성향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퇴조하고 고립의 세계로 전환되면서 국제기구의 위상도 전에 없이 추락할 수 있다. 팬데믹 상황에서 WHO를 둘러싼 세계적 의구심이 그 징조를 보여준다.

 

각 나라와 도시는 바뀐 세상에 적응하고 생존해야하기에 지난 세기의 ‘탈 중심화’, ‘자족성’ 개념을 다시금 꺼내들 가능성이 높다. 각 도시들은 타 지역에 의존하지 않고 자립하기 위한 정책에 집중할 것이며, 특히 생존과 직결되는 제품과 서비스를 자체 공급하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이다. 이러다 보면 공유경제, 4차 산업, 스마트도시와 같은 미래 정책의 키워드들은 한동안 퇴색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위기의 소문들이 머리를 아득하게 만드는 시기이다. 하지만 글로벌리즘이 유토피아가 아니었듯, 팬데믹이 디스토피아를 의미하는 것만도 아니다. 중세 흑사병이 종교개혁의 여건으로 이어졌듯이, 팬데믹 세상도 그간 찾지 못했던 새로운 싹을 틔우는 시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캠퍼스를 떠나 홀로 있는 시간들을 성찰로 채워가면서 새로운 기회와 희망을 탐색했으면 한다. 당장 한동의 모습에서부터 많은 변동이 있을 것이다. 방학 때면 세계 곳곳에서 활약하고 돌아와서는 그을린 얼굴로 서로 개강인사를 나누던, 그런 감동적인 모습들은 이제 보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동대가 사랑한 것은 글로벌리즘 자체가 아니라, 이를 통해 나타날 하나님 나라의 임재요, 확장이었음을 이해한다면 실망할 필요는 없다. 글로벌 선교를 떠난 바울, 베드로가 자유롭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예상치 못하게 때로 한 도시에 발이 묶이고 심지어 감옥에 갇힐 때도 있었다. 하지만 고립된 시점에 하나님의 나라는 더 폭발력 있게 전파되었음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글로벌리즘이라는 잘 닦인 고속도로는 사라졌을지언정, 보이지 않는 또 다른 길들이 여전히 예비되어 있음을 믿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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