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성은 굉장히 흥미로운 특징이다. 인터넷 문화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이며, 사람들의 행동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요소이다. 이와 같은 특징을 확인 할 수 있는 곳이 한동대 실명카톡방과 에브리타임이다. 실명카톡방에서는 자신에 대한 완벽한 익명성이 보장이 안 된다. 대부분 자신의 실명을 사용하고, 자신의 프로필 사진 등이 타인에게 노출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명카톡방에서는 분란이나 논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말투도 공손하고, 서로를 배려하고 조심한다. 반면, 한동대 에브리타임은 실명카톡방과 분위가 사뭇 다르다. 말투도 날카롭고, 상대방에 대한 비방도 쉽게 찾아볼 수 있고, 표현도 거칠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지만, 이와 같은 모습은 에브리타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실명카톡방이 좋고, 에브리타임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익명성은 그냥 상황에 대한 조건일 뿐이다. 대부분 선택적으로 사용하는 조건이다. 익명성을 보장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날 것 그대로의 표현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용자가 갖고 있는 생각을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라는 일종의 유인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익명성을 이용하는 것이 잘못된 것도 아니고, 표현이 거칠다고 나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익명성을 이용하는 이유 앞에 당당할 수 있는가는 중요한 문제이다.


얼마 전 94년생의 젊은 배우이자 가수가 악플로 인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녀의 죽음을 추모하며, 익명성의 뒤에 숨어 악플을 다는 악플러들을 비난했다. 악플러와 악플에 대한 조치를 촉구했고, 그 조치의 중심에는 익명성이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익명성을 사용하는 이유 앞에 당당할 수 있다면, 악플은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안될 것이다. 익명성은 엄청난 용기를 주는 신비로운 특징을 갖고 있다. 실명이라는 것 앞에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부담을 느끼게 되고 작아질 수 밖에 없다. 처음 신문사에 들어와서 기사를 쓸 때, 내 이름을 기사에 단다는 게 엄청난 부담이었다. 당시 국장님에게 내 이름을 빼고 기사를 내달라고 부탁까지 했었다.


실명으로 한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다른 표현이다. 그리고 그 책임의 무게를 견딘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학생 기자 활동의 가장 큰 장점이 그 어려운 일을 배운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신문사의 모든 기자들은 그 무게를 견디며 글과 영상 등을 작성하고 있다. 자신의 글과 영상 앞에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한동의 모든 학우들도 이러한 무게를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비겁하고 부끄럽게 익명성에 의존하며,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저작권자 © 한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