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학회 베네딕트
경영경제학부 17학번 조수아

 

말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말로 사람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다.
베네딕트는 라틴어 ‘축복받은’이란 뜻을 가진 Benedictus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말이다. 처음 베네딕트의 문을 두드린 많은 사람들의 목적은 고상하게 말하면 논리적으로 말하고 싶기 때문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언쟁에서 지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 크다. 나 또한 그랬다. 그렇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들에게 베네딕트가 가장 먼저 던지는 질문이 있다.


“선한 토론이란 무엇인가?” 토론이 어떻게 선할 수 있는가? 많은 사람들의 인식과 달리 토론에서는 승패가 갈린다. 패자가 분명히 있는, 말로 하는 경기를 토론이라고 한다. 누군가는 패자가 되고, 누군가는 승자가 된다. 토론을 배우면 배울수록, 내 말이 맞다고 확증하는 능력은 늘어가지만 토론을 준비해낸 과정보다 토론 결과에 집착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베네딕트는 선한 토론을 하는 사람들을 만들고자 한다. 말이란게 교묘해서 실체가 없는 울림으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형체 없는 비수가 되어 타인을 난도질할 수도 있다. 사적인 언쟁에서 타인을 이겼을 때를 생각해보라. 청중이 있든지 없든지 당장에 이 사람을 말로 눌렀고, 본인이 맞다고 증명해냈고, 후련하게 이뤄낸 그 성취에 눈이 가려 상대의 마음이 어떻게 피를 흘리고 있는지 보지를 못한다. 베네딕트의 문을 두드려왔던 모든 사람들이 생각했던 대로, 우리 학회가 ‘토론에서 이기는 법’만을 가르쳐준다면 그것은 어린 아이에게 칼을 내어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갓 학회에 들어왔던 나에게도 베네딕트는 같은 질문을 던졌다. 선한 토론에 대한 해답은 모든 학회원들이 각자의 삶에 물어봐야 한다. 나 또한 내 삶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고, 스스로에게도 물어보았다. 나는 그 답을 ‘말 못하는 친구’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 내 친구 중에서 말을 그다지 속 시원하게 못하는 사람이 있다. 하나를 주장하는 데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너무 많은 공감을 하고, 너무 많은 생각이 필요한 사람이다. 한때는 그게 너무 답답해서 왜 그렇게 길게 말 하냐고, 딱 이것만 말 하면 되지 않냐고 장난스레 타박한 적도 있다. 허물 없는 사이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 친구가 해준 말을 요약하자면 ‘말로 사람을 상처주고 싶지 않다’였다. 그때 나는 그 친구에게 말로 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 친구가 하는 말의 목적이 나를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설득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밑바탕에 타인을 향한 배려가 깔려 있었던 그 때의 토론이 우리 베네딕트가 추구해야 할 목표라고 생각한다.


말을 더 잘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을 더 잘 쓰기 위해 우리가 모였다. 토론이기 때문에 승패는 갈리겠으나, 승리의 과정이 설득이 되어야 한다.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바탕이 되어야 말로 사람을 축복하는 선한 토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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