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고양이를 볼 때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손을 뻗어 고양이를 만지고 애정을 쏟는다. 운수 좋은 날에는 기분이 좋은 고양이를 만나, 그들이 하사하는 ‘궁디팡팡’의 기회를 만끽하기도 한다. 반면, 누군가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고양이에게 두려움을 느낀다. 밤길에 갑자기 뛰쳐나온 고양이로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하며, 고양이 울음소리로 밤잠을 설치기도 한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든, 고양이를 무서워하는 사람이든, 우리는 서로의 입장을 존중해야 한다. 어느 한쪽이 옳다고 주장할 수 없음은, ‘나’가 소중한 만큼 ‘너’도 소중하기 때문이다. 나와 너가 소중하기에 우리 또한 소중하며, 나아가 모든 ( )는 소중하다. 괄호 안을 채우려다가, 잠깐 멈칫했다. 저기엔 ‘사람’이 들어가야 할까, ‘생명’이 들어가야 할까.


누군가 설치한 덫 때문에, 한동대 고양이들의 발이 잘렸다. 단순히 고양이를 무서워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한 것일까? 아니다. 그저 하나의 생명을 경시하고 짓밟은 행동이다. 많은 학생이 분노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동물과 사람이 다르다는 현실 속에, 동물의 생명을 마음대로 할 권리는 없다, 라고 생각했다.
 

고양이가 소중하다면, 소와 돼지 또한 소중하지 않을까. 피부색과 권력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소중하듯, 종류에 상관없이 모든 동물이 소중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열악한 사육환경에서 생산된 고기와 유제품을 먹는 나는, 5만 마리가 넘는 돼지가 살처분되는 것을 보는 나는, 왜 침묵하고 있을까. 고양이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사라져 버리기라도 한 걸까.
 

나는 고양이 학대 사건에 분노했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동물의 생명이 짓밟혀서가 아닌, 한동의 고양이들을 내가 좋아했기 때문이다. 나와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벗어나면 수많은 동물의 아픔이 있는데, 나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내가 관심 있는 것만, 나는 소중하게 여긴다. 모든 동물의 생명은 나에게 소중하지 않다.
 

결국 제목의 괄호는 빈칸으로 남겨뒀다. 언젠가 저 괄호를 자신 있게 채우고 싶다.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고 외치고 싶다. 나와 관련 없는 모든 것들이 소중하다 외치고 싶다. 내 괄호 안을 나와 관계없는 자들에게 내어주고 싶다.
 

예수가 그러했듯, 작은 예수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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