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씩 삽을 들고 흙을 뿌리기 시작했다. 깊지 않았던 구덩이는 금방 흙으로 덮였다. 그 위에, 사람들은 들고 있던 꽃을 한 송이씩 내려놨다. 누군가의 슬픔, 누군가의 감사와 다짐, 누군가의 후회는 꽃과 함께 작은 둔덕을 이뤘다. 그의 웃음을 닮은 밝고 따스한 날, 각지에서 모인 검은 물결은 김영길 전 총장을 조용히 추모했다.

사진 이주섭 기자 leejs@hgupress.com

2019년 6월 30일 초대 총장이었던 김영길 전 총장이 별세했다. 장례는 한동대 그레이스 스쿨(IGE)에서 수목장으로 치러졌으며 교수와 교직원, 학생을 포함해 1,000여 명이 김영길 전 총장을 추모하기 위해 모였다. 그는 한동대가 개교한 이래 20여 년간 네 차례의 총장 역을 맡았고, 퇴임 후에도 한동대 명예총장과 유엔아카데믹임팩트(UNAI) 한국협의회 회장 등을 지냈다. 올해 5월부터 *1숙환의 악화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온 그는 향년 81세로 타계했다.

김영길 전 총장의 퇴임 이후 5년이 흐른 지금, 한동대 재학생 대부분은 김영길 전 총장을 만나보지 못했다. 교수들과 졸업생들의 이야기 속 그의 일화를 간간이 듣고, 갈대상자 책을 통해 그를 그려볼 뿐이다. 김영길이란 사람은 누구였을까, 우리는 그를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비행기를 좋아했던 어린 소년

김영길 전 총장은 1939년 10월 3일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지례리라는 작은 마을에 살았던 그는 좋아하는 비행기를 만들고 또 만들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성년이 돼 서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한 이후 그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미국 NASA 루이스연구소 연구원과 카이스트 재료공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미국 NASA 발명상을 2회 수상한 그는 미국의 저명과학자 인명사전인 ‘미국의 과학자들’(AMWS)에 한국인 최초로 수록됐다. 또한, 그가 개발한 기술은 우리나라 최초 선진국 기술 수출 1호가 됐다. 김영길 전 총장의 경력은 화려했고 편안한 길이 그의 앞에 펼쳐진 듯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포항 변두리에 세워질 대학교 총장을 맡아 달라는 부탁이 들어왔다.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서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기에 그는 완곡히 거절했다. 그러나 주위에서 한 설득과 함께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세워질 것이라는 비전은, 그에게 한동대 총장직을 결심하게 했다.


광야로의 초대

한동대는 문을 열고 첫 입학생을 받았지만, 그 발걸음이 향한 곳은 가시밭길이었다. 한동대 재단의 재정적 출처였던 환경업체가 경영난에 휩싸였고, 은행의 대출이 불가능해지며 돈을 끌어올 방법이 모두 막혔다. 교수들의 월급은 밀렸고 직원 노조는 파업에 들어갔다. 1996년 ‘교육개혁추진 우수대학’으로 선정되며 숨통이 트이는 듯했으나 지원받은 재정을 학사 운영 및 밀린 교직원 월급으로 차용한 것이 고발됐다. 이로 인해 김영길 전 총장은 *2국고보조금 *3전용죄로 재판을 받았고 2001년 법정구속 됐다. 후원자들의 지원과 기부로 연명하던 한동대는 ‘하나님의 대학’이라기엔 너무 초라했다.

“본관 4층에 가면 지금도 기도실이 있지. 혼자서도 기도하시고 교수들과 같이 기도도 하셨는데, 내 기억으로는 총장님 기도는 그야말로 절박했던 것 같아”. 공간환경시스템공학부 정상모 교수는 그때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2005년 이후로는 재정적 숨통이 트였는데, 그 이전에는 언제 부도날지 몰랐으니까. 교도소에 가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고. 당장 돈은 바닥이 났고, 은행은 대출을 다 끊어버렸고, 월급은 밀려 있었고. 가끔은 양말을 짝짝이로 신고 온 것을 모를 정도로 절박하게 기도하고 매달리셨던 것 같아.”

김영길 전 총장은 6년 동안 76번 법정에 출두했고, 이사장은 2년 사이 4번 바뀌었다. 그러나 이러한 진통 속에서도 한동대는 기틀을 다져 갔다. 무전공과 무학과로 입학하는 입시제도, 전산과 영어를 강조하는 실무교육 등 한동대는 다방면의 분야에서 인정받았다. 한동대 졸업생은 국내 유수의 기업들에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경주 교도소에서 진행한 스승의 날 행사는 여러 언론사가 이를 보도하며 한동대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마지막으로, 미안합니다

김영길 전 총장 재임 당시 한동대 내부에 진통이 없던 것은 아니다. 그의 굳은 신념과 추진력에서 나오는 행동들은, 때론 독선적이고 소통이 부족하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김영길 전 총장은 그의 마지막 채플에서 소통이 미흡했음을 언급했다. 그는 “한동인 모두의 귀한 의견을 존중하지 못하고 잘 소통하지 못해 미안하다”라며 “부족한 리더임에도 한동이 이렇게 성장한 것은 전적으로 한동인 덕분”이라고 말했다. 그 후 김영길 전 총장은 14년 2월 4일 총장 자리를 내려놨다.


너털웃음, 더벅머리 총장님

김영길 전 총장을 소개해달라는 질문에 정상모 교수는 “본인보다 학생들을 위하는 분”이라고 말했다. “안아 주시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학생들을 자식같이 대했지. 또 옛날부터 교수식당을 별도로 마련하자는 의견이 있었는데, 교수와 학생은 같이 먹어야 하는 거라며 (교수식당을 짓는 것을) 반대하셨어.”

김영길 전 총장을 언급할 때, 많은 학생은 그의 미소를 기억한다. 항상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 시험기간 학생들의 어깨를 주무르던 그의 모습은 많은 이들의 마음 가운데 새겨져 있다. 그가 진정으로 학생들을 사랑했기 때문일까, 그의 가르침이 세상과 다른 특별한 것이었기 때문일까. 김영길 전 총장을 만나보지 못했음에도 재학생들은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고 슬퍼했다.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

한동대가 세워진 이후 많은 세월이 흘렀다. 초대 총장이었던 김영길 전 총장을 비롯해 한동대의 건립을 함께한 많은 교수와 학생의 자리를 새로운 사람들이 채워가고 있다. 1세대가 끝나고 다음 세대가 한동대를 이끌어가는 현시점에서, 김영길 전 총장의 별세 소식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한동대가 세워진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한동인은 어떤 가치와 소명을 지켜야 하는가.

김영길 전 총장이 퇴임을 앞두고 우리에게 당부한 말은 ‘세속화되지 말 것’이었다. 그는 수많은 기독교 명문대학이 처음과는 다른 모습으로 흘러갔음을 말하며, 한동대만은 하나님의 대학으로 남아있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한동대를 세웠던 김영길 전 총장은 우리의 곁을 떠났다. 어떤 것을 덜어내고 어떤 것을 담아낼 것인지, 한동대가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한 답은 우리의 몫이다.

*1 숙환: 오래 묵은 병.
*2 국고보조금: 기업설비의 근대화, 시험연구의 촉진, 기술의 개발 및 향상, 재해복구 등의 목적을 위하여 국가가 무상으로 교부하는 금액
*3 전용: 예정되어 있는 곳에 쓰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돌려서 쓰는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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