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열. 언론, 출판, 보도, 연극, 영화, 우편물 따위의 내용을 사전에 심사하여 그 발표를 통제하는 일을 말한다. 검열은 굉장히 뿌리가 깊다. 과거 국가의 안위, 집단의 안정을 위해 일정량의 검열은 필수라는 것이 보편적 인식이었다. 그러나 현재 사전검열제는 금지됐다(대한민국 헌법 제21조 제2항). 논리적인 흐름에 문제가 없는지 등을 검토하는 작업과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 검열은 내용물의 질이 아니라 사상을 통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체검열은 무엇인가. 자체검열은 집단 스스로 구성원들의 입과 손발에 재갈을 물리는 것이다. 자체검열은 권력 기관에서 본보기로 강력한 응징을 가하면 발생하게 된다. 이는 눈에 보이는 제도가 아니다. 자체검열은 개개인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잠잠하지만 분명히 실재하는 현상이다.

언론으로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자체검열이라 생각한다. 공론화를 담당해야 할 언론이 자체검열 함으로써 공론장을 축소하는 것은 존재 이유를 상실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언론은 계속해서 공론장을 확대해야 하며, 그 경계선을 넓혀가야 할 의무를 진다. 언론은 안전한 원 안이 아니라 원의 경계에 서 있어야 한다. 그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경계에 서 있는 자는 따가운 눈초리를 받게 돼 있다. 특히 집단의 성격이 확정돼 있을 때 더욱더 그러하다. 집단이 안정돼 있을 때 누가 그 경계를 허물기 바라겠는가. 그러나 모든 이의 생각이 원 안에서만 머물 때 집단의 성격을 더욱 폐쇄적이게 될 것이다.

집단의 성격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의 문제 역시 간단치 않다. 깃발을 꽂고 그곳을 중심으로 모인 집단이라고 해도, 깃발 꽂힌 지점을 집단 정체성이라 규정할 수 있을까. 둥글게 모이다 보면 분명히 경계를 밟는 이가 존재하게 된다. 경계에 서 있는 자를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것인가는 더욱 치열하게 논의되야 한다.

언론이 경계선을 넓히고 허무는 역할을 담당하지 않는다면, 원 안 사람들은 더욱 중심으로 원 경계에 있는 사람은 바깥으로 밀려갈 것이다. 결국 한 집단 안에서 뚜렷한 양극화가 생기게 된다.

이번 사설을 쓰면서도 ‘이 정도 괜찮나’ 계속 스스로에게 되물어 보게 된다. 수준에 대한 검토가 아니었다. 글이 누군가에게 색깔있게 보일까 두려웠다. 정체성이 주요 화두로 떠오른 한동대 현 상황의 영향이었다. 어쩌면 역사의 한 페이지일 작금의 상황에서, 더욱 자체검열에 유의할 것을 약속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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