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경상북도 풍정리에서만 들을 수 있는 라디오가 있다. 시골 마을 최초 FM 라디오, 풍정라디오에서는 평생 방송국 주변조차 가보지 못했던 어르신들이 라디오 PD가 되고 DJ가 된다. <풍정라디오>는 TBC에서 제작한 단편 영화로, 평균 77세 산골 마을 노인들의 라디오 방송 제작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다.

TBC는 지난해 3월 경북 예천군 개포면 풍정리 마을회관에 89.1MHz FM을 개국해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가청권은 풍정리 반경 1km이며 시청자는 40명이다. 풍정리 어르신들의 생애 첫 라디오 방송 도전기를 담은 풍정라디오는 적적했던 공간에 웃음이 피어나고 닫혔던 마음이 열리는 삶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NG 걱정 없는 라디오

풍정라디오의 진행자와 스태프는 모두 풍정리 어르신들이다. 풍정라디오에서는 오전6시부터 자정까지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주로 내보낸다. 방송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언제든지 마이크 앞에 앉으면 된다. 헤드폰을 이마에 쓰고, 볼륨을 조절하는 방법을 몰라 마이크에 입을 댔다 멀어졌다 하기도 하고, 음반을 틀지 못해 직접 노래를 부르는 등 폭소를 만발하게 하는 어르신들의 생방송은 예측을 불허한다.

듣기만 했던 라디오를 별다른 연습도 없이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와 달리 어르신들은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방송을 진행해 나간다. 풍정라디오는 정해진 편성표도, 방송 대본도 없다. NG가 나도 아무 문제없다는 것이 기성 라디오와의 차이점이자 풍정라디오만의 가장 큰 매력이다. 어르신들이 마이크 앞에 앉아 얘기하다 보면 대화의 주제는 종종 삼천포로 빠지곤 하는데, 이는 마치 옆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정겨운 느낌을 준다.  

조작법이 익숙하지 않은 탓에 노래가 나가는 동안 잡담이 그대로 방송되는 경우도 자주 발생한다. 라디오 진행을 맡은 어르신들이 CD와 연결된 *페이더를 올리면서 마이크와 연결된 페이더를 내리는 것을 깜빡했기 때문이다. 음악이 나가는 중에 방심하고 던진 한 마디 한 마디로 웃음바다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사소하고 작은 실수는 되려 주민들에게 재미와 웃음을 선사하고 더없이 정감을 느끼게 한다.

 

라디오, 마음과 마음을 잇다

수많은 사람들의 입담으로 가득했던 자리, 이번에는 손순희 할머니가 마이크 앞에 앉았다. 장애를 가진 아들이 결혼을 실패한 이후 1년 동안 우울증을 앓으며 집 밖을 나오지 못했던 할머니였다.

“동민 여러분, 상춘이 어머니, 제 이름 손순희입니다. 1년을 내가 동네 회관에 못 왔어요. 아들에게 (안)사람이 있다가 가고 아들 마음이 너무 심란하고 그걸 곁에서 지켜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 오고 싶었는데 발걸음이 안 떨어지더라고요, 왠지. … 아지매들, 형님들 내가 문을 열고 있을 테니 우리 집에 놀러 오시오. 마음이 우울해서 내가 만날 문을 꼭 닫고 어른들 앞에 못 나타나고 죄송해요. 그러니 우리 집에 놀러 오시오, 전부 우리 집에 오셔서 화투도 치고 우리 집에 노래방 기기가 있으니 노래도 전부 같이 부르고 그럽시다. 내가 눈물을 보여서 미안해요. 이걸로 인사 끝낼게요.”

방송에 출연하기까지 긴 고민의 시간을 거쳤지만, 진심이 담긴 오랜만의 인사말을 전하며 손순희 할머니는 마음을 열었다. 방송을 들은 온 동네 사람들 역시 마음의 병을 앓았던 할머니를 누구보다 이해하며 감싸줬고, 할머니의 우울증은 방송 후 이웃과 자연스레 어울리면서 서서히 사라졌다. 미디어에는 많은 역할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풍정라디오는 치유의 기능을 보여준다.  

 

 

이웃을 향한 사랑은 라디오를 타고

산골 마을에 사는 노인들의 경우에는 빈곤이나 무직업보다도 ‘고독’으로 인한 문제가 크다. 풍정리 역시 힘겨운 농사일에 지쳐 이웃과의 대화도 많이 줄어든 조용한 시골 마을이었다. 하지만, 풍정리에 라디오가 들어오면서 주민들의 삶이 바뀌기 시작했다. 나이 일흔에 라디오 방송 장비 사용법을 배우고, 직접 PD와 DJ가 돼 각양각색의 사연과 목소리를 담아낸 풍정라디오는 조용했던 마을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풍정라디오에는 삼층밥 짓던 새색시 시절, 만담 공연 보러 시내 나들이 가던 처녀시절 등 지난 추억이 담긴 사연 및 소소한 일상과 더불어 각자의 숨은 사연이 담겨있다. 오랫동안 타지에 살다가 고향 집에 방문한 아들의 소식을 라디오 방송으로 동네 사람들에게 전하고, 방송 듣던 분들이 반가운 마음에 찾아가기도 한다. 풍정라디오는 단순한 라디오를 넘어 서로와 서로를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돼 주었다. 라디오를 매개로 이야기꽃이 피고 그동안 소외됐던 이웃들이 모여들면서 서로 소통하며 마음이 하나로 통하게 된 풍정리. 그 기적 같은 변화를 담은 작품, 풍정라디오다.

 

 

<풍정라디오> 박원달 PD와의 만남

TBC 방송사 박원달 PD가 연출을 맡은 <풍정라디오>는 제11회 서울노인영화제 대상을 비롯해, 제51회 휴스턴국제영화제 은상, 한국방송대상 우수작품상 등을 수상하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작품에 ‘라디오 방송을 통한 풍정리 어르신들의 삶의 변화’를 담고자 했던 박 PD는 현재 <풍정라디오 시즌2>를 제작하고 있다.

Q 세상에 없던 라디오를 기획하게 되신 계기가 무엇인가요?

박원달 PD(이하 박): 광복 70주년 특집으로 ‘우리 엄마’라는 다큐를 준비할 때부터 거슬러 올라가는데요. 다큐가 끝나고 나서, 같은 소재로 다큐의 연작을 만들려고 하다가 여러 요인으로 인해 촬영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봉착했어요. 그래서 다른 소재를 고민하게 됐죠. 그러던 중에 유럽에서 방영된 <라디오 가가>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됐어요. 라디오 중계차를 가지고 소년원, 교도소 등 소외된 곳을 찾아가는 프로그램이었어요. 그러고 나서 TBC 견학 프로그램에서 사용하는 라디오 장비를 보는 순간, 고민이 해결됐어요. TBC에서 사용하지 않는 아날로그 라디오 프로그램들을 시골에 가져가서 마을에 방송국을 만들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골 어르신분들의 라디오 방송 제작기를 담아보자’ 그게 컨셉이었어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처럼 예측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재미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Q 기존의 라디오와는 다른, 풍정라디오만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박: 기존의 라디오는 매스미디어잖아요. 풍정라디오도 공중파 형식을 띠고 있어요. 89.1 MHz의 주파수로 허가를 받은 라디오이기 때문에 형식은 MBC, SBS, KBS와 똑같아요. 그런데 그 범위가 다르죠. TBC 같은 경우 대구, 경북 지역에서 방송되고 MBC 같은 경우에는 전국으로 방송되지만 여기는 풍정리 반경 1km만 방송이 되거든요. 초미니 FM이죠. 그래서 사실상 형식은 매스미디어이지만, 그 마을 주민들만 들을 수 있어요. 그래서 라디오로 더 행복해지고 이웃 간 이해도 좋아질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풍정리만의 마을 방송이니까, 어르신들이 NG 걱정도 없잖아요. 본인들만 들으시기 때문에. 어떤 말이든지 마음 편하게, 원고 없이도 말씀 잘하시고 하다 보니까 짜여진 각본 없이 그 자체만으로 자연스럽고, 설정돼 있지 않은 재미가 있었어요. 어르신이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더 재미있고 좋은 결과가 나온 것 같아요.   

Q 산골 마을에서 라디오라는 매체는 어떻게 사용될 수 있을까요?

박: 어르신들에게는 라디오가 옛날의 추억을 잠기게 하기도 하고, 또 하나의 매개체예요. 사실 어르신들의 평균 나이가 풍정리만 77세가 아니라 다른 시, 도 또한 평균이 기본 70~ 80세 정도가 되세요. 시간이 지나도 인구 유입이 안 된다면 그분들이 평균 90세가 될 거고, 어쩌면 그 지역이 소멸될지도 모르죠. 그런데 라디오라는 게, 어르신들을 이어주는 통로 역할을 해요. 라디오 방송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매개로 해서 어르신분들이 관계에 있어서 활성화가 될 수 있을 것이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요. 일 끝나고 오셔서 일찍 주무시고, 혼자 밥 드시는, 혼자 사시는 집이 많기 때문에 사실 많이 적적하시죠. 그런데 라디오가 있으면 동네 어르신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아무래도 더 많아질 수 있죠. 대화도 많이 늘어나고, 옆집의 사정도 알게 되고 그러면서 마을이 더 즐겁게 변하는 것 같아요. 라디오라는 게 단순히 라디오 방송을 할 뿐만 아니라, 풍정라디오 같은 경우에는 오락의 기능도 있었고 치유의 기능도 있었던 것 같아요.      

 

Q 미디어가 소외된 계층을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박: 일단 가시적으로 풍정라디오가 보여준 것에는 분명히 치유의 기능이 있었어요. 우울증을 앓고 계셨던 할머니가 라디오 방송을 하면서 집 밖으로 나올 수 있었고, 지금은 마을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계시거든요. 그리고 넓게 보면 우울증에 걸리셨던 할머니뿐 아니라 그 마을 주민들 모두 노인이라는 입장에서 아무래도 소외된 이웃에 해당될 수가 있기 때문에, 라디오를 통해서 이분들이 더 즐거워하시고 웃으실 수 있다면, 충분한 역할을 했다고 여겨져요. 이장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어르신들이 매년 한 분씩 돌아가시니까 오늘 하루 즐겁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즐겁게 사는 방법 중 하나가 풍정라디오를 그 마을에 세팅하는 것이었어요. 결과적으로 어르신들의 만족도가 굉장히 높았죠. 이러한 사례들이 미디어가 할 수 있는 역할이라고 보여져요. 더불어 저는 크리스천으로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렇게 두 가지를 방송 제작이라는 달란트를 가지고 실천하고자 해요. 제가 풍정라디오를 하면서 동네 어르신들이 행복해지실 수 있다면 이것이 이웃 사랑과도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만족스럽고, 그래서 작년 포함해서 5년 정도 더 찍을 계획이에요. 6년째에는 편집 과정을 거쳐서 그간 어르신들의 변화를 담은 장편 영화를 만들 것 같아요. 그 장편 영화에 미디어가 소외된 계층을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한 답이 나오겠죠.

Q 인생의 선배자로서 같은 분야를 꿈꾸는 한동대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박: 일생이잖아요. 한 번밖에 없는 삶.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할 것 같아요 한 번밖에 없기 때문에. 그리고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들은, 늘 다르게 만들고 싶어해요. 풍정라디오도 다른 PD들이 안 했거든요. 다른 PD들과 다르게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한동대 학생들도 다른 학교 학생들과 다르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영어 공부하고 학점 따는 것은 기본이지만, 다른 이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해야 할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누가 시키는 것만 하지 말고 스스로 찾아서 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회사에서 제작비를 받아 만드는 것이지만 직접 글을 쓰고, 국내외 영화제에 출품하고, 내가 만든 콘텐츠를 수출하면서 다른 PD들이 하지 않는 일을 찾아서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남들과 똑같이 살지 말자.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니까. 이런 말이 하고 싶었어요. 이상입니다.  

 

 

*페이더: 혼합기에서 제각기 입력 채널이나 출력의 음량을 조정하는 부분, 또는 부품.

송수빈 기자 songsb@hgupress.com

사진제공 박원달PD

 

저작권자 © 한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