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S 18 이창준

 지난 6월,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제 마련을 명령한 헌법 재판소의 판결이 있었다. 대체복무에 대한 과거 한국 기독교계의 입장은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는 “대체복무는 이단종파를 위한 특혜가 된다”, “병역기피 풍조가 만연한 상황에서 기독교인들 중 일부가 대체복무제에 귀가 솔깃해 넘어갈 수 있다” 라 했다.

 하지만 양심적 병역거부는 기독교 대 여호와의 증인 구도가 아니다. 그래서는 안된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하는 이들 모두가 여호와의 증인은 아니다. 그 중에는 신실한 기독교인이자 반전(反戰)주의자도 있다. 또한 여호와의 증인 모두가 양심적 병역거부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여호와의 증인일지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종교적 도그마를 따를지 말지 결정하는 것은 그 개인의 의지다. 우리가 종교의 프리즘을 걷어내고 이것을 바라봐야 하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종교의 안경을 벗고 대한민국 시민의 눈으로 이것을 바라본다면 이는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이 사안은,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대체복무제 자체에 대한 찬반 보다는 변화하는 대한민국 안보의 한 흐름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현재 북한의 잠재적 위협은 존재하나, 남북 간 외교안보는 평화적인 분위기이다. 이에 더해 현대전은 재래식 징병부대보다는 고도로 훈련된 엘리트 부대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이런 추세에 맞추어 국방부는 군 복무 기간을 줄이고 있다. 헌재는 양심을 이유로 한 병역거부에 대해 군사훈련의 ‘예외’ 를 인정했다. 대법 또한 무죄판결을 내렸다. 앞선 일련의 사회적 합의들은, 작금의 군이 사병들의 부담을 줄이고 사실상 전투에 쓰일 수 없는 이들에게 예외를 적용하여 현대전에 걸맞는 엘리트 군사력을 지향하는 데서 기인한 바가 크다. 이는 곧 모병제를 향한다.

 뿐만 아니라, 당장의 대체복무 논의는 징병제라는 틀 안에서만 진행되는 점에 그 한계가 있다. 지금껏 청년들의 마음 속에 병역은 상처였다. 군대에서는 연간 100여명이 사고와 자살로 죽고, 군대를 갔다 오면 제 각기 몸에 병 하나 짊어지고 온다.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원망스러운 마음은 여기서 나온다. 이렇게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공평하게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기에 국방부는 고된 교도소 업무를 대체복무로 검토하게 된다. 군대에 가는 국민들이 ‘징병제 하에서 내가 고통받으니 너 또한 고통받아야 한다’ 라고 아우성치게 되는, 참으로 안타까운 광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국가 입장에서도 징병제 하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처벌하는 것은 손해였다.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스스로 감옥에 갈 정도의 강한 의지를 가지는데 대체복무를 마련치 않고 무작정 그들을 처벌하는 것은 다른 곳에 쓸 수 있는 인원을 감옥에 낭비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종국에는 징병제 내에서 대체복무가 어떻게 시행되어야 하느냐에 대한 정부의 고민이 깊어진다. 국가 입장에서는 대체복무를 도입하는 힘겨운 과정을 거쳐야만 징병제를 유지할 수 있게 됐다.

 결국 대체복무를 둘러싼 논쟁은 지금의 징병제에 대한 잡음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대체복무는 조금 참고 인정하되 앞으로 징병제 군대의 의무복무 기간이 더더욱 줄어들고 군인의 처우가 개선된다면, 더 나아가 한정된 인력과 예산을 모병제를 통해 집중시킨다면 어떨까. ‘아무나, 예외없이’ 가게 되는 지금의 군대가 아닌, ‘누구든, 선택하여’ 가게 되는 군대를 상상할 수 있다. 한기총이 말한 병역기피에 대한 우려도, 대체복무자에 대한 젊은이들의 원성도, 정부의 난감한 입장도 해결될 것이다. 사설(辭說)이 이렇기에 필자의 눈에는 현재의 대체복무 이슈가 모병제를 향해 나아가는 과도기적 진통으로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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