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할 때 나올 수 있는 질문들이야. 네가 학대받는 걸 즐기는지, 대마초를 상용하는지, 술은 얼마나 마시고 종종 술집에 혼자 가는지, 속옷은 입는지, 성병, 임신중절 여부도 물을 거야. 물론 이의를 제기하겠지만, 가끔 이의가 무시되기도 해.”

 

영화 ‘피고인’ 속 한 대사다. 성폭행 피해자인 주인공은 사건 당시 음주상태에 노출이 심한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범죄 피해를 인정받지 못할 위험에 처한다. 이는 사법부가 ‘노출이 심한 옷을 입은 피해자의 행동으로 성범죄가 발생한다’는 인식을 재판에 적용하면서 비롯된 사건이다. 30년 전 개봉한 영화지만 영화 속 장면은 2018년 한국에서 흔하게 발견된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성범죄 피해자들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성범죄 피해자를 둘러싼 사회적 통념 존재해

한국 사회 내에는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적 인식이 일정 부분 존재한다. 한국에 남아있는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는 성범죄를 정당화하는 일부 여론을 조성한다. 3월 한국리서치가 실시한 ‘미투(#MeToo)’ 운동 관련 여론조사에서 ‘성폭력이나 성추행을 당한 피해자도 일부 책임이 있다’는 주장에 국민의 절반가량(46.3%)이 동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이미경 소장은 해당 문항에 대해 “한국에 남아있는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가 2차 피해를 정당화시킬 때가 많았음을 드러내는 문장이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이 소장은 “해당 설문조사는 우리 사회에 아직까지 성범죄 피해자를 피해자 그 자체로만 인식하지 않는 부정적인 사회적 통념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해당 문항의 동의 비율을 비교했을 때, 세대 간 차이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동의한다’ 비율은 연령이 높아질수록 상승한다. 동의 비율은 ▲20대 24.0% ▲30대 27.9% ▲40대 46.4% ▲50대 58.0% ▲60세 이상 64.9%다. 60대 이상 여성의 동의 비율은 60.4%로 20대 여성(13.2%)의 약 4.6배, 20대 남성(33.7%)의 약 1.8배인 수치다. 사회학 분야 전문가들은 60대 이상 여성들이 오랫동안 사회를 지배한 가부장적 문화에 의해 형성된 관념을 가지고 있고 성평등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세대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 소장은 “60대 이상 어머니 세대들은 가부장제에 순응하면서 오히려 딸에게 희생을 강요했던 세대인데 이 문화가 일순간에 사라지지는 않는다”라고 밝혔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피해 사실을 밝힘과 동시에 생겨나는 사회적 압박 때문에 피해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고소하기를 꺼린다. 2017년 대검찰청 공식자료에 따르면, 성범죄 신고율은 실제 발생한 사건 수의 약 2%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이 소장과 *한국여성의전화 정춘숙 전 상임대표는 피해자의 낮은 신고율의 이유에 대해 성폭력 행위들이 대부분 직장이나 학교·가정 등 공동체 영역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라고 제3차 여성 정책 환경변화와 미래정책 패러다임에서 밝힌 바 있다. 이 소장과 정 전 상임대표에 따르면, 피해자들은 자신의 피해 사실을 폭로할 경우 그로 인해 공동체가 파괴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신고를 망설인다.

 

 

수사기관·사법기관의 성인지 감수성 부족

범죄의 여부를 판가름하는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도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적 통념으로 인한 2차 피해가 발생한다. 이는 수사·재판 담당자들의 성인지 감수성 부족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성인지’란 성별에 따른 입장과 경험을 동등하게 고려함으로써 성차별적 영향을 배제할 수 있는 기본인식을 뜻한다. 국회입법조사처가 2014년 발표한 ‘성폭력 법·정책을 통해 본 피해자의 권리’에 따르면 2004년부터 2013년까지 형사사법 절차에서 발생한 대표적 2차 피해 사례 54건 중 22건의 유형이 수사·재판 담당자들의 인권침해와 관련됐다. 인권침해로 이어진 유형에는 ▲성폭력에 대한 이해 및 전문성 부족으로 인한 무례한 발언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운 모습 강요 등이 있다. 익명을 요청한 A 변호사는 “사건 발생 후 피해자의 행동을 두고 같은 성을 가진 이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납득되는 일들에 대해 재판부는 ‘의문부호’를 붙일 때가 정말 많다”라며 “당연한 일을 설득시키는 것만큼 성폭력사건에서 어려운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법조인들은 재판 중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드러내는 발언을 해 2차 가해를 저지르기도 한다. 2016년 8월 서울서부지법 성폭력전담 재판부의 이 모 부장판사는 실제 법정에서 ‘여성이 술을 마시고 성관계를 맺는 것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또한, 3월 11일 있었던 성폭행 사건 재판 중, 가해자 측 대리인이 피해자에게 일반적인 피해자의 모습을 띠지 않는다는 발언으로 2차 가해를 가한 일이 있었다. 1심 피해자 증인신문에서 피해자인 30대 ㄱ씨는 가림막을 거부하고 가해자와 마주 보며 재판에 임했다. 그러자 가해자 측 대리인은 “진짜 성폭력 피해자는 가해자를 보는 것조차 버거워한다”라며 “ㄱ씨가 법정에서 이성적으로 대응하고, 피해 이후에도 일상생활을 평소와 다름없이 영위하는 것이 피해자답지 않다”라고 주장했다. 이는 ‘음주 상태에서 성관계를 맺는 것은 부도덕한 행위’, ‘성폭력을 당한 사람은 수치심과 자책감에 시달릴 것’ 등의 사회적 통념이 존재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일부 경찰도 수사 과정에서 성폭력에 대한 편견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 경상대학교(이하 경상대) 사회복지학과 이명신 교수와 경상대 정보통계학과 이계민 교수가 작성한 『성폭력 수사 경찰의 수사 행동(공정성 실천과 이차피해) 결정요인: 성폭력에 대한 편견과 임무 인식 』에 따르면, 성범죄 수사에 있어 경찰이 다른 범죄에 비해 피해자 보호에 대한 부분을 소홀히 하거나 피해자에 대해 과잉수사를 할 가능성이 최대 70.6%로 나타났다. 경상대 사회복지학과 이 교수는 “경찰관의 입장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진짜 강간’과 ‘진짜 피해자’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보일 때 경찰은 성폭력 피해자를 더욱 불신하고 비난하게 된다”라고 지적했다. 지난 해 한국여성의전화는 ‘#경찰이라니_가해자인 줄’ 캠페인을 통해 2차 피해 사례를 모집하고 그 중 112건을 묶어 사례집으로 제작했다. 2차 피해 사례집에는 경찰이 수사 중 성범죄 피해자들에게 남긴 ▲‘그게 무슨 성폭력이에요. 성추행도 안 되겠다’ ▲‘그러게 왜 옷을 그렇게 입고 다녀?’ ▲‘걔(가해자) 부모님을 생각해봐’ ▲‘네가 예뻐서 그랬나 보지’등의 발언이 담겨있다.

 

갈 길이 먼 성 인식 개선 방안들

국가 차원에서 이뤄지는 성 관념에 대한 개선 방안들은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 국가 차원에서 실시하는 성인지 감수성에 관한 교육은 미비한 수준이다. 교육부가 2015년 6억 원을 투입해 만든 ‘학교 성교육 표준안’은 시대착오적이고 편향적이라는 지적을 받은 바 있다. 표준안 내용에는 ▲데이트 폭력의 원인은 남성이 데이트 비용의 대가로 성관계를 요구하는 데 있음 ▲성폭력을 당한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함 등이 있었다. 이에 교육부는 표준안을 수차례 수정했지만, 논란이 거듭되면서 현재 표준안을 비공개로 전환한 상태다.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인식 개선이 담긴 법안 개정안은 정기국회 이전 열렸던 임시 국회에서 하나도 통과되지 않았다. 여성가족부가 6월 12일 공개한 보도자료에 제시된 성범죄 피해자 보호와 관련한 법안 네 개는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이다(10월 1일 기준). 피해자 보호와 관련해 계류 중인 여러 법안의 세부내용은 ▲성폭력 피해자가 겪는 불이익 처분 대상을 구체화 ▲예술인이 성적 침해행위를 당했을 시 이뤄지는 구제 규정 ▲공직 내 성폭력 사건 신고자 또는 피해자에 대한 불이익 금지 신설 ▲사업주의 성희롱이나 징계 미조치에 관한 처벌 강화 ▲노동위원회를 통한 성희롱 구제절차 신설 등이다. 범정부 성희롱ㆍ성폭력 근절 추진점검단 윤세진 총괄팀장은 해당 자료를 발표하며 “대책의 이행력 확보를 위해서는 법률 개정이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라고 밝혔다.

 

 

법안개정으로 바뀐 스웨덴, 한국은?

법안 개정은 사회적 인식 개선에 기여할 수 있다. 일례로 스웨덴의 시민단체 파타(Fatta)가 지난 5년간 바꾸려 노력한 성범죄의 사회적 패러다임은 7월 법안 개정을 통해 완전히 공고해졌다. 개정된 성범죄 처벌법이 7월부터 시행된 이래로 스웨덴 사회 내에서는 강간에 대한 인식의 틀이 ‘No means No’(아니라고 하면 아닌 거야)에서 ‘Only Yes means Yes’(예스라고 할 때만 할 수 있는 거야)로 점차 전환됐다. 즉, ‘예스’와 ‘노’ 사이에 놓인 상황을 이전에는 암묵적 동의로 간주했다면, 지금은 거절로 간주한다. 스웨덴의 종전 법에서 검사가 강간죄를 적용하려면 폭력 또는 폭력을 가하겠다는 위협, 강간을 성립시키기 어려운 상황에서 강요당했다는 것 등을 입증해야 했다. 그러나 새 법안에 따르면 검사는 단순하게 뚜렷한 동의가 없었다는 점만 입증하면 된다. 모르간 요한손(Morgan Johansson) 스웨덴 법무 및 이민 장관 (Justice and Migration Minister)은 "타박상 등 육체적으로 저항했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조항도 삭제될 것"이라고 밝히며 "수동적인 자세를 동의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또한 요한손 장관은 “해당 패러다임의 전환을 끌어낸 것만으로도 입법의 충분한 의의가 있다”라고 밝혔다.

한국도 9월부터 열린 정기국회에서 스웨덴의 개정된 성범죄 처벌법과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법안이 발의됐으나 통과될 지는 미지수다. 지난 달 3일 정의당 이정미 대표는 동의하지 않는 성관계를 처벌하는 ‘비동의 강간죄 형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번 개정안은 폭행이나 협박이 없는 상태라 하더라도 상대방의 동의가 없다면 강간죄로 간주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 대표는 “이 법이 도입되면 성관계를 할 때마다 물어봐야 하냐는 질문이 제기되곤 한다”라며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는 피해자에게 커다란 수치심과 절망감을 안겨주는 범죄이지 무용담이나 자랑거리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성범죄는 성별의 차원을 떠나 사회 정의의 관점으로 해결돼야 할 문제다. 한국여성의전화 관계자는 “성폭력 사건을 개인적 차원이 아닌 사회적 문제로 바라보고 해결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또한, 해당 관계자는 “성범죄가 자신과 무관한 문제가 아님을 인지해야 한다”라며 성인지 감수성의 필요성을 호소했다. 차별철폐를 위한 담론과 운동이 여러 갈래로 진행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이제는 우리나라도 성범죄에 대한 새로운 사회적 규범의 형성이 이뤄져야 할 때가 아닐까.

 

*한국여성의전화: 1983년 만들어진 여성시민단체. 가정폭력, 성폭력, 성매매, 이주여성 문제 등의 문제로부터 피해자들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활동을 한다. 9월 현재 전국 25개 지부가 있다.

 

 

조혜진 기자 chohj@hgu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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