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는 묻고 개인은 질문에 응한다. 각본은 언제나 정해져 있다. 애석하게도 개인의 목소리는 없다. 이 장면에 주인공이 되려면 감독이 정해놓은 틀에 맞게 연기를 해야 하고, 감독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 내가 얼마나 가난한지, 내가 왜 피해자인지, 내가 얼만큼 고통받고 있는지. 수천 번 입으로 말해야 하고, 온몸으로 보여줘야 하고, 놓칠세라 증거도 다 모아놔야 한다. 분명 각본 속 주인공의 모습은 나의 모습과 다르지 않은데도 긴장의 끈을 놓쳐서는 안 된다. 조금이라도 각본 속 대사와 같이 말하지 않거나 잠깐이라도 각본 속 대사와 어긋난 행동을 보이거나, 감독의 눈에 들지 않으면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나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부정당하는 순간이다. 주인공에 못 미치는 나의 모습은 거짓이 버리고 만다. 각본에 가려진 나의 이야기, 나의 목소리는 어떤 장면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우리 사회에서 약자가 살아가는 모습이다. 약자는 약자의 모습을 보여야만 하고, 이를 증명해야만 사회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 심지어 약자의 모습은 본연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사회가 약자를 바라보는 시선에 부합해야 한다. 학생은 자신이 얼마나 찢어지게 가난한지 증명해야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 피해자는 항상 움츠리고 다녀야 하며 가해자 몰래 녹음하거나 내가 괴로워하는 걸 누군가 목격해야 한다. 을은 갑에게 자신의 상황이 부당하다고 처절하게 계속 외치고, 행동해야 한다. 사회의 시선에 부합하지 않으면, 모든 건 각본을 지키지 않은 약자의 책임이다. 말하지 않으면, 보여주지 않으면, 증명하지 않으면 장면에서 버려지기 일쑤다.

주인공이 되지 못한 약자는 또다시 버려진다. 사냥감으로, 응징의 표본으로, 때론 연민의 대상으로 다양하게 소비된다. 2차 피해다. 각본은 누가 짰는지, 각본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이에 대한 의심은 없다. 여태 그래왔듯 혹은 언제나 그럴 것이라는 드라마 결말을 기대한다. 약자의 목소리는 각본 아래에 짓눌렸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얼마나 열악한 상황인지에 대해선 공감받지 못하고 집중되지 않는다.     

드라마 결말은 바뀌어야 한다. 특정한 누군가에 의한 각본은 수정돼야 한다. 스웨덴의 경우, 지난 7월 성범죄 처벌법이 개정됨으로써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달라졌다. ‘No means No(아니라고 하면 아닌 거야)’에서 ‘Only Yes means Yes(예스라고 할 때만 할 수 있는 거야)’로 전환된 것이다. 특히, 위력에 굴복해야 했던 약자의 상황과 목소리가 고려됐다. 이는 시민단체 파타(Fatta)의 5년간 노력으로, 시민 모두가 동참해 드라마 결말을 바꾼 것이다. 한국 역시 약자를 둘러싼 사회적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정해진 각본에 맞지 않더라도 이를 개인의 잘못과 책임으로 몰고 갈 수 없다. 개인의 목소리가 각본에 반영돼야 하고 우리가 모두 감독이 돼 드라마 결말을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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