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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통 속 글 하나] 만화경
한동대학교학보사  |  hgupress@handong.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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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8.29  16: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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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방안에는 짙은 색 원목 가구들이 놓여있다. 침대와 그 옆에 탁자, 옷장과 벽에 붙은 책상. 딱 필요한 가구들만 있어 조금은 휑한 느낌이 든다. 방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온다. 통이 넓은 체크무늬 바지와 흰 티, 품이 넉넉한 베이지색 카디건을 입고 한 손에는 커피가 든 머그잔을 들고 있다. 흰 테두리 안 검은 수면 위로 수염이 거뭇거뭇한 턱이 비친다. 조금 내려온 다크서클에 건조해진 피부는 지금 그가 피곤한 상태임을 말해주지만 표정은 담담하다. 남자는 통유리로 된 벽 앞에 있는 책상으로 걸어간다. 의자에 앉아서 차분한 눈길로 창밖을 주시한다. 밖에는 세찬 비가 내리고 있다. 회색으로 바랜 풍경을 비추는 창문에는 여러 크기의 물방울들이 새겨진다.
남자의 집은 골목 삼거리 중심부에 있다. 집 앞에 횡으로 길이 나 있고 정문에서 직선으로도 길이 쭉 뻗어 있다. 그 일직선을 기준으로 양옆에는 일반 가정집이 있다. 그가 있는 방은 이 층으로 그 구도가 모두 내려다보인다. 비가 꽤 심하게 오는 탓에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다. 회색 거리를 감상하던 그는 왼쪽 집으로 고개를 돌린다. 마당에는 자그마한 정원이 하나 있다. 집과 마당마저도 회색으로 변한 곳에서도 정원은 꿋꿋하게 제 색을 유지한다. 연분홍색, 노란색, 짙은 붉은색과 보라색. 다양한 색과 모양의 꽃들은 질서없이, 하지만 난잡하지 않게 피어있다. 주인의 미적 감각인지 자연스러운 조화인지는 모르지만 탁월한 정원이다. 그 꽃 무리를 바라보며 잠깐 눈을 반짝이던 남자는 오른편 집으로 고개를 돌린다. 거기에는 빈 개집과 사료가 가득 찬 그릇이 놓여있다. 걷히지 않은 빨래는 강한 바람에도 용케 날아가지 않고 제자리에서 펄럭인다. 반대편 정원의 영향일까, 무채색인 평범한 마당이 어쩐지 삭막하게 느껴진다.남자는 다시 시선을 돌려 길 위에 빗물이 고인 웅덩이를 본다. 그러자 거기로 파란색 물감이 한 방울 떨어지고 회색 풍경을 천천히 물들인다. 그 위로 일곱 살인 남자의 모습이 나타난다. 주위에는 또래로 보이는 남녀 아이들이 모여있다. 연분홍색, 노란색, 짙은 붉은색과 보라색. 다양한 색과 모양의 우비를 입은 아이들은 내리는 비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며 골목길은 뛰어다닌다. 아니 오히려 그를 즐기는 듯, 빗물이 고여있는 물웅덩이를 만나면 그 안으로 힘껏 뛰어들어간다. 우비가 젖고 사방으로 물이 튀면 서로를 보고는 깔깔거리며 웃는다.
남자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입가에는 작지만 분명한 미소가 새겨진다. 머그잔을 내려놓고 집 앞에 있는 가로등을 본다. 그 위로는 노란색과 붉은색 물감이 떨어지고 천천히 퍼지며 자연스럽게 섞인다.
깜깜한 골목길에 켜진 가로등 아래 스무 살인 남자와 그의 어깨까지 오는 여자가 서로를 마주 본 채 서 있다. 남자의 첫사랑이다. 서로 집은 가깝지만 그사이에 어두운 골목을 두 번이나 지나야 했기에 항상 남자가 바래다주었었다. 오늘은 왜인지 여자가 자신을 바래다주겠다고 고집을 부린 날이다. 남자가 웃으며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흰색 플랫슈즈를 신은 여자는 남자의 양어깨를 잡고 뒤꿈치를 든다. 두 눈을 질끈 감은 그녀는 가볍게 그의 입술에 키스한다. 
남자는 이제 확연히 미소 짓고 있다. 바깥은 여전히 무채색이지만 색이 번진 기억들이 그를 위로한다. 눈동자에 잠깐 아련한 빛이 맴돌다 사라진다. 그는 눈을 감고 여전히 김이 올라오는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신다.

문동진 상담심리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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