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편이다. 혼자 있을 때마다 수시로 흑역사를 떠올리고, 밤마다 이불킥을 하는 건 일상이다. 나는 부끄러움에 취약한 내 모습이 항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 왠지 지는 것 같았고, 그 뒤에 오는 무기력함도 견디기 힘겨웠다. 그러다가 심리학자 신화연의 <부끄러움 코드>라는 책을 만났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적어도 부끄러움을 부끄러워하지는 않게 되었다. 저자는 쓸모없는 ‘약자의 감정’이라고 여겨지는 부끄러움이 사실은 인간의 선한 본성을 회복시켜주는 감정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내가 몇 년 전에 읽었던 이 책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 이유는 부끄러움을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것 같은 한 가족 때문이다. 행여나 자식들이 다칠까 봐 세 남매 모두 낙하산에 실어서 자신의 회사 요직에 하나씩 꽂아주는 아버지. 칠순을 앞둔 나이에도 밀치고, 소리 지르고, 물건을 던지는 모습이 영락없는 미운 네 살을 연상시키는 어머니. 그 밑에서 자란 세 남매도 부모를 쏙 빼 닮았다. 큰딸은 땅콩이 접시에 담기지 않았다는 이유로 250여 명이 탑승한 비행기를 유턴시켰다. 둘째 아들은 경찰관 뺑소니에 70대 노인을 폭행했다. 막내딸은 직원에게 물컵을 집어 던지고 폭언을 일삼는다. 이들이 이런 행동을 서슴없이 여러 번 반복해서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부끄러움을 모르기 때문이다. 태어나보니 입에 금수저가 물려져 있었던 이들이 살면서 부끄러움을 경험해 본적이나 있을까. 부끄러움의 감정은 자신이 한 행동을 돌아보고 반성할 때 가능하다. 내가 한 말과 행동을 되돌아보았을 때, ‘내가 왜 그랬지’ 하고 머리를 쥐어박고 싶어지는 것이 부끄러움이다. 이들은 살면서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잘못을 인정할 필요도, 사과 할 필요도 없었다. 인간은 부끄러움을 상실할 때 이토록 추악해진다.
부끄러움 상실의 시대다. 방송에서는 가장 부끄러운 기억, 창피한 기억을 드러내는 것이 대중에게 ‘먹힌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 된다. 그러나 심리학자 신화연은 부끄러움이 인간의 희망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부끄러움은 ‘자아의 경계를 허물고 타아를 초대하는 소통의 코드’이고, ‘그들과의 관계를 꿈꾸게 하는 관계의 공간’이다. 만약 인간에게 부끄러움이 없었다면 이 세상은 지금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했던 소수의 움직임으로 세상의 빛은 조금이나마 유지될 수 있었다.
다른 이의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낄 때 우리는 흔히 ‘부끄러움은 왜 나의 몫인가’라고 말한다. 정작 조양호 일가는 알지 못하는 부끄러움을 대한민국 국민들이 대신 느끼고 있다. 힘 센 이들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자신을 돌아보고, 주변을 둘러봐야 살아남을 수 있는 약한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느낀다. 부끄러움은 항상 그것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이들의 몫이다.
부끄러움의 회복, 부끄러움의 교육이 필요한 때다. 1974년, 박완서 작가는 이미 부끄러움이 교육의 영역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의 단편소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의 마지막 대목은 4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유효하다. “내 주위에는 많은 학생들이 출렁이고 그들은 학교에서 배운 것만으론 모자라 ××학원, ○○학관, △△학원 등에서 별의별 지식을 다 배웠을 거다. 그러나 아무도 부끄러움은 안 가르쳤을 거다. (중략)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라고. 아아, 꼭 그래야 할 것 같다. 모처럼 돌아온 내 부끄러움이 나만의 것이어서는 안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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