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이 세상에서 슬픔이라는 감정을 정호승 시인의 ‘슬픔이 기쁨에게’만큼 아름답게 표현한 시가 또 있을까. 얼마 전 새벽까지 잠 못 들던 밤, 이 시가 밤새 나를 지켜주었다. 인생의 회의를 느낄 때마다 나를 잡아주던 것도 결국 한 줄 시였다. 읽고 쓰는 것이 지겨웠는데, 정호승 시인의 시를 읽으며 우리말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사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시 속에 다 들어있고, 쓸데없는 말을 더해서 시를 해치고 싶지 않았지만 시를 읽으며 한동신문의 독자가 떠올라 어쩔 수 없었다. 한동신문은 한동대학교의 공식 언론 기관이다. 언론의 역할은 권력을 감시하고 독자의 알 권리를 충족하는 것이다. 저널리즘의 이해 수업에서 배운 내용이다. 언론의 일이 누군가를 감시하고 견제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보니 기사 내용이 썩 유쾌하지는 않다. 기사를 읽다 보면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남이 듣기에 불편하고 슬픈 일을 쓰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다. 슬픔을 기록하지 않겠다는 것은 언론으로서 책임을 회피하겠다는 말이다. 기쁨만을 주는 것은 언론일 수 없다고 배웠다. 기쁨을 원한다면 예능을 보면 된다. 언론은 예능이 아니다. 언론까지 기쁨에 가담하지 않아도 세상은 기쁨을 주는 것으로 차고 넘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슬픔이다. 방돌이, 방순이의 코 고는 소리 뒤에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해야 하는 그의 고단함을 아는 것. 밥고에 오지 않는 새내기의 말 못 할 주머니 사정을 아는 것. 나는 그 슬픔을 아는 것이 한동대에서 배우는 그 어떤 전공 지식보다 중요하다고 믿는다.
한동신문은 독자에게 슬픔을 주고 싶다. 슬픔 끝에 오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함께 나누고 싶다. 우리 주변의 이웃들에게 비친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고 싶다. 슬픔을 마주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게다가 기사 글은 시처럼 아름답지도 못하다. 기쁨으로 넘치던 일상의 훼방꾼처럼 잔잔하던 독자들의 마음에 불편함 감정을 던져 놓는다. 슬픔에 대해 알게 된 순간 우리는 이제 알기 전으로 되돌아 갈 수 없다. 안다는 것은 불편을 감수하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앎에서 오는 불편함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여성학,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씨의 말처럼 알려는 노력, 세상에 대한 애정과 고뇌를 유보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에.
독자에게 슬픔을 주고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림이다. 2주마다 발행되는 신문은 그 기다림에 대한 결과물이다. 오늘도 캠퍼스 가판대 곳곳에서 한동신문은 슬픔을 받아줄 독자를 기다린다.
정호승 시인은 슬픔이 사랑보다 소중하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예수님이 가르치신 ‘이웃 사랑’을 위해 우리는 더 슬퍼야 하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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