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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끝나지 않은 비극의 역사
유설완 기자  |  yusw@hgu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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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4.11  00: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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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이 비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제주 4∙3평화공원 전시관 입구에 들어서면 커다란 비석이 있다. 어떤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백비’다. 봉기∙항쟁∙폭동∙사태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온 제주 4∙3은 아직까지 역사적 이름을 얻지 못했다.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백비는 언젠가 4∙3이 정명돼 이름이 새겨지길 기다리고 있다.

이름 짓지 못한 역사
제주 4∙3은 복잡한 사건과 시선 속에서 아직 정명이 없다. 제주 4∙3은 남조선노동당 제주도당(이하 남로당 제주도당), 미군정, 이승만 정부, 제주도민 등 다양한 주체와 이념이 얽힌 역사다. 제주 4∙3 평화공원 조명근 문화해설사는 “제주 4∙3사건 이라고 하는데 사실 ‘사건’은 이름이 아니에요. 다른 4∙19혁명, 광주 5∙18 민주화 운동 등과 다르게 역사적 평가가 내려지지 않아 아직 이름이 없어요”라고 말했다.
제주 4∙3은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빨갱이’에 의한 폭동으로 불리곤 했다. *제주 3∙1 발포사건 당시, 조병옥 경무부장은 3∙1 발포사건이 북조선과 내통으로 발생했다는 내용을 공표해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조작했다. 이후 미군정 보고서에는 ‘제주도는 70%가 좌익정당에 동조적인 좌익의 본거지’라고 기록되는 등 제주에 대한 미군정과 정부의 탄압이 시작됐다. 제주 4∙3 이 끝난 이후에도 제주도민은 빨갱이 섬이라는 낙인으로 연좌제에 시달렸으며, 제주 4∙3은 역사적 평가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제주 4·3 평화공원 전시관 입구에 위치한 백비. 유설완 기자 yusw@hgupress.com

제주 4∙3은 학살의 역사다. 2003년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가 작성되면서 제주 4∙3이 국가공권력에 의한 학살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에서 작성한 해당 보고서는 제주 4∙3을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정의하고 있다. 1948년 10월 17일 이승만 정부의 지령에 따라 해안선 5km 이외의 있는 사람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총살하겠다는 포고령이 발표됐다. ‘초토화 작전’이었다. 군인, 경찰, 서북청년단이 연합한 토벌대는 약 4개월 동안 중산간 마을에 들이닥쳐 집집마다 불을 지르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주민들을 학살했다. 제주도 중산간 마을의 95%가 불탔고, 2만여 명의 제주도민이 이때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제주 4∙3은 항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제주도민은 해방 이후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일본 적폐청산을 주장했다. 제주도민은 미군정과 경찰의 탄압에 맞서 3.10 총파업 돌입했고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반대하기 위해 5∙10 선거를 거부했다.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양정심 교수는 『1947년 제주 3.1 기념대회 주도세력에 대한 소고』에서 3∙1 기념대회와 총파업을 주도한 세력은 남로당 제주도당, 민족주의민족전선을 비롯한 좌익세력이었다고 밝혔다. 이들은 3∙1 기념대회, 3∙10 총파업을 거쳐 4∙3 봉기의 무장활동을 주도했다. 양 교수는 “가난한 사람이 조금 더 잘 살 수 있는 세상, 진정한 독립의 세상에 대한 일반 대중의 열망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당이 대중을 선동했다고 할 수 있지만, 당시 제주도민은 그렇게 수동적인 존재가 아닌 적극적으로 당당하게 역사를 대면한 존재들”이라고 말했다.

4•3을 기억하는 오늘의 목소리
88세의 오태경 문화해설사는 가시리 마을에서 나고 자란 제주도민이다. 가시리 마을은 제주 4∙3으로 가장 많은 희생자(407명)가 발생한 마을 중 하나다. 당시 마을 사람들 다수가 학교로 끌려가 무차별적으로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왜 사람들을 죽인 거예요?”라는 질문에 오 문화해설사는 가슴을 치며 답했다.

“도대체 그 이유를 모르겠어, 단지 마을이 중산간에 있다는 동기 말고는. 마을 사람들이 토산으로 끌려가서 청장년들, 처녀들 따로 ‘너, 너, 너’ 나오라고 해서 전부 죽였어. 그래서 토산은 그 당시 청년 하나 없는 마을이 됐지. 죄가 있으면 법원 가서 재판을 받아야 하는데 우리는 공권력에 탄압을 받고 죽으니까 어디 하소연할 때가 없는 거야, 탄압받고 병신 돼서 불구가 된 사람이 163명이야. 그리고 미국도 책임이 있어. 당시 미국이 작전권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418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북촌리 마을에서 이상언 문화해설사가 제주 4∙3에 대해 입을 열었다. 이 문화해설사는 “남로당이라는게 처음부터 불법단체가 아니었어요”라며 “미군정이 들어서 38도 이남에 정부를 수립하려니까 남로당에서 반대했고 ‘자기네를 반대하는 세력이다’해서 불법단체로 매도해버렸죠”라고 말했다. 이 문화해설사는 제주 4∙3이 정명 되기 위해서는 제주 4∙3에 대한 재평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때 당시 남로당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은 북한사람들이 아니라 제주도 사람들이에요. 제주도의 젊은 청년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 통일 정부를 주장하고 해방이 되고 나서도 친일세력이 경찰이 되어 활개 치는 것을 보고 적폐청산을 하기 위해 활동한 거지, 지금의 시점으로 4∙3을 바라봐서는 안 돼요. 4∙3이 제대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항쟁했던 사람들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해요. 그리고 4∙3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이유는 경찰, 군인, 서북청년단 등 가해자에 대한 기록과 처벌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70년 동안 쌓인 제주의 눈물
제주 4∙3의 70주년 추모식장에 모인 사람들의 어깨에 동백꽃 배지가 자리 잡았다. 동백꽃은 꽃잎이 아닌 꽃봉오리가 함께 진다. 동백꽃은 차가운 땅에 스러졌던 제주 4∙3의 희생자를 상징한다. 추모식장으로 향하는 길, 검은 비석으로 둘러싸인 추모의 공간이 맞아줬다. 검은 비석에는 2만 여명의 희생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유족들은 가족의 이름을 부르며, 비석 위의 글자를 손으로 짚어갔다. 비석에 새겨진 2만 명의 이름에 얼마나 많은 슬픔이 담겨있을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영령들을 위한 두 번 반의 절. 비석 앞에 흩뿌려지는 술을 마지막으로 새하얀 국화꽃만이 검은 비석 앞에 남겨졌다.

 
   
이상언 문화해설사가 북촌리 마을 애기 무덤 앞에서 해설하고 있다. 북촌리 학살 당시 젖도 떼지 못한 채 죽은 아이들이 묻혀있다. 유설완 기자 yusw@hgupress.com
 
 

‘밟고 선 땅 아래가 죽은 자의 무덤인 줄 봄맞이하러 온 당신은 몰랐겠으나, 돌담 아래 제 몸의 피 다 쏟은 채 모가지 뚝뚝 부러진 동백꽃 주검을 당신은 보지 못했겠으나’ 이종형, 『바람의 집』

아직 유골조차 찾지 못해 비석으로만 남겨있는 행방불명인 표석으로 발을 옮겼다. 아직 제주 어딘가에 묻혀있는 수많은 유골들 대신 3,896개의 이름만이 이곳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비석 앞에서 한 노부인이 흰 장갑을 끼고 조심스럽게 비석을 닦았다. 희생자의 얼굴인 것처럼 노부인은 비석에 새겨진 이름을 한참이나 어루만졌다. 비석 앞에서 과일과 술을 놓고 절을 하던 진중하 씨를 만났다. 진 씨는 제주 4∙3이 일어난 연도에 태어났다. 진 씨는 “전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언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도 몰라요”라며 “어머니와 할머니는 4∙3과 가족의 죽음에 말을 아끼셨어요”라고 말했다. 험난한 시절에 속에서 잉태됐던 새 생명은 어느덧 자라 할머니가 됐다. 진 씨는 “어렸을 때는 무언의 압박 속에서 정말 4∙3에 대해 조금도 말하지 못하게 했어요. 지금이라도 이렇게 비석이라도 세워지고 제를 올릴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라며 미소지었다. 추모식장에서 잔잔한 선율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노래는 바람을 타고 유족과 영령들의 슬픔을 위로했다.

   
유골을 찾지 못해 세워진 행방불명인 표석에서 유족이 예를 올리고 있다. 유설완 기자 yusw@hgupress.com

‘바다는 아무 말 없이 섬의 눈물을 모아 바위에 기대 몸을 흔들며 파도로 흐느낀다지,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간 사람들은 4월이 오면 유채꽃으로 피어 춤을 춘다지’ 루시드폴, 『4월의 춤』

반주에 맞춰 애국가를 부르는데 울음 맺힌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노부인이 한 손에 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애국가를 부르고 있었다. 애국가 제창이 끝난 뒤, 눈시울이 붉어진 노부인은 추모식에 참여한 두 아이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그녀는 누구를 떠올렸을까. 아마 이제는 만질 수 없는 그리운 이가 아니었을까. 노부인의 눈에 끝내 참지 못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추모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말했다. “여러분, 제주에 봄이 오고 있습니다” 그랬다. 벚꽃잎이 흐드러지고 동백꽃이 피어나는 제주, 제주도민 마음속에 4.3으로 얼어붙었던 차가운 마음을 녹이는 봄이 오고 있다.

   
그래픽 옥녹현 일러스트기자 oknh@hgupress.com

 

 
 
   
 
 
 그래픽 옥녹현 일러스트기자 oknh@hgupress.com
 

*제주 4∙3: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

*제주 3∙1발포사건: 3.1절 기념대회에 기마 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치이자 주변 제주도민의 항의에 경찰이 총격하여 민간인 6명이 사망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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