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6일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지루할 만큼 익숙한 등굣길과 교실의 소란스러움. 조례가 끝난 즈음, 담임 선생님 몰래 핸드폰을 제출하지 않은 친구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실시간 검색어를 읽었다. 종례시간, 모두 심각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쳐다보고 있었다. 304명이 저 캄캄한 바다로 가라앉았다는 소식에 그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으로 제주도로 가는 배에 탑승했던 이들은 끝내 가족에게 돌아오지 못했다. 평범한 고등학생의 평범했던 학부모는 진도 앞바다에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시신이라도 찾기 위해 밤낮을 새우게 됐다. ‘이제 그만 잊어라’는 사람들에게 비탄한 심정을 전하고자 거리에서 삭발을 하기도 했다. 며칠 뒤면 세월호 참사 4주기다. 그렇게 4년이 흘렀다.

 분향소 앞에 걸려있던 목판. 잊지 않고 행동하겠다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윤예준 사진기자 yunyj1@hgupress.com
   

광장으로 뛰쳐나온 시민들
“그날 밤부터 설마, 설마 했어요. 배가 완전히 가라앉을 때까지도 설마, 설마 했는데. 그 뒤로도 한 명도 못 나오는 걸 보면서 제가 미치기 시작한 거예요(39쪽).”

세월호 참사는 유가족뿐 아니라 현시대를 함께 사는 시민들에게 상실의 아픔을 가져다줬다. <잊지 않을게, 절대로 잊지 않을게>는 10 개의 인터뷰로 구성된 책이다. 세월호 참사를 주제로 유가족인 아닌 시민을 조명한 책은 <잊지 않을게, 절대로 잊지 않을게>가 처음이다. 누군가에게 벌어진 불행에 자신의 것을 내려놓고 연대의 뜻을 표한 그들. 인터뷰이들은 공통적으로 ‘그날 이후로 나는 미쳤다’라고 말한다. 인터뷰이들은 참사 이후 직장에서, 학교에서, 교회에서 거리로 뛰어나왔다.
아이가 떠나버린 텅 빈방. 치울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방에 그림이 걸린다. 아이의 초상화가 한 점. 아이의 일상을 담은 그림이 한 점. 가족이 다같이 모여 웃고 있는 그림이 한 점. 늘어난 그림은 벽을 메우고 침묵을 메우고 가끔은 슬픔도 메우면서 가족들에게 말을 건다(33쪽).

첫 인터뷰의 대상이 된 최강현 씨는 영어 전문 기업에서 근무하는 직장인이다. 낮에는 회사를 다니고 밤에는 시간을 쪼개 희생자와 유가족의 그림을 그린다. 단원고 희생자 전부를 그려낸 사람으로는 최 씨가 유일하다. 초상화를 그릴 때 어떤 감정이 드냐는 작가의 질문에 최 씨는 “그려 보면 아이들이 다 예뻐요. 얼굴은 다르지만 각각 다 예쁘구. 어린 친구들을 제가 이렇게 오래 바라본 적이 없거든요”라고 답했다. 최 씨는 본인의 그림을 ‘박카스’ 같다고 얘기한다. 그림을 받고 유가족은 잠깐 힘을 얻을 수 있겠지만, 그것이 근원적인 상실의 아픔을 치유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럼에도 최 씨는 “그걸로라도 잠시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 이상 제가 바랄 나위는 없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이 휑뎅그렁한 세상을 ‘울 수도 없이’ 살아가야 하는 건 단지 그녀만이 아니다. 오늘도 유가족들은 아이들이 속했던 반별로 돌아가며 당번을 맡아 광화문과 안산분향소로 출근한다. (중략) 고단했던 하루를 눌러 끌 것이다. 오지 않는 잠을 청할 것이다. 밤새 뒤척일 것이다. 아침만 기다릴 것이다. 그러나 그 아침에도 그들이 맨 먼저 보게 되는 광경은 아이들의 빈자리일 것이다(62쪽).

홍길동처럼 필요할 때 언제든 어디서든 나타나 국슬기 씨는 국길동으로 불린다. 국 씨는 참사 직후 진도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자원봉사센터에서는 결원이 생길 때마다 그를 호출했다고 한다. 인터뷰 말미에 작가는 국 씨에게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를 물었다. 국 씨는 긍정문이 아닌 부정문으로 답했다. “뭐가 변했는지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아직 안 끝났잖아요. 아직 안 끝났으니까 해야죠.” 삼 년 동안 거의 울지 않았다는 국 씨. 작가는 그가 울지 ‘않’았던 게 아니라 울 수 ‘없’었을 거라고 말한다.
울음은 미처 막을 새도 없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에서도 울음은 기어코 비어져 나온다. 그러나 그것만큼 자연스러운 애도가 또 있을까. 인터뷰이들은 운다. 누구는 소리 내서, 또 누구는 가슴으로. 어린 나이였던 그들에게 찾아온 끔찍한 참사 앞에서 모두는 울 수밖에 없었다.

집회 한편에서는 리본을 걸기 위한 조형물이 만들어 지고 있었다. 윤예준 사진기자 yunyj1@hgupress.com


<잊지 않을게, 절대로 잊지 않을게>
배영란, 정원선 작가와의 만남


인터뷰 당일(3월 31일), 주말의 광화문은 어지러웠다. 세월호 광장에서는 스텔라 데이지호 침몰 사고 추모 집회 준비가 한창이었다. 인터뷰는 세월호 광장에 위치한 일명 ‘상황실’에서 진행됐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여러 차례 두 작가의 코 주변과 눈시울이 붉어졌다.

Q 작가님 개인 분들에게는 세월호 참사가 어떤 계기가 됐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배영란(이하 배): 참사 때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제가 원래 방송 일을 하던 사람이어서 그때 방송 준비하던 게 너무 중요했어요, 개인적으로는. 쭉 스케줄을 조정하고 해서 그날이 최종이 나오는 날이었거든요. 그래서 그 미안함이 컸던 게 있는 것 같아요. 누구의 생사가 왔다 갔다 하는 그 시간에 저는 제 일이 미뤄지는 것 때문에 계속 제 생각만 하고 있었거든요. 미안한 마음에 4∙16 활동에 참여했던 것 같아요.

스텔라 데이지호 추모 집회 한편에서 진행된 리본 만들기 부스에서 기자와 대화 중인 정원선 작가. 윤예준 사진기자 yunyj1@hgupress.com

정원선(이하 정): 저도 비슷해요. 집에 있다가 뉴스로 봤고. 맨 처음에 전원 구조라고 떴잖아요. 큰일 날 뻔했는데 잘됐네. 이미 잘 수습된 마당에, 사고가 크게 났으면 이명박 박근혜의 잘못 들이 좀 더 들춰져서 제도적으로 개선됐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 그 생각들이 되게 무서운 일이었다는 것을 몇 시간 지나 바로 알게 됐죠. 되게 참혹했던 것 같아요. 그 당시에 그 애들이 살아 나올 것이라고 끊임없이 여지를 줬잖아요. 그래도 누군가는 몇 명이라도 나오겠지 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나오지 않고 죽음으로 끝났죠.

Q 자기 것을 챙겨야 하는 사회에서 타인의 아픔을 바라보기가 참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배: 음, 저는 잘 모르고 확 들어오게 된 거예요. 단지 미안한 마음이었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다면 내가 똑같은 상황이 됐더라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겠구나 그런 감정이입들이 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한 달, 두 달 보내게 되니까 부모님들이랑 관계가 생기게 되더라고요.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아이들이랑도 관계가 생기고. ‘아, 이제 내가 할 만큼 했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 딱 나올게.’ 그래서 그렇게 나올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제 삶이 됐어요. 이 책에 나오는 삶이 됐어요. 24시간을 살면 기꺼이 두 세시간은 서로를 위해 떼어주게 된 거죠. 저도 비슷한 것 같아요.

정: 책에서도 많은 분들이 얘기했지만, 뭘 하고 있다고 느끼는 분들은 많이 없을 것 같아요. 부모님들 댁에 가보면, 놀랍게도 아이들 방이 곧 아이들이 들어올 것처럼 그대로예요. 매일 청소하시고. 그런 분들을 보면 안 울 수 없게 되는 거죠.
배: 부모님들은 떡이나 과일 같은 것을 사서 오시면 아이들 방에 뒀다가 다음날 먹어요. 과일이야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따뜻한 음식 같은 거는 맛 없어지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들 먹으라고 두시고 하루나 이틀 있다가 드시거든요. 아직도 그러세요.
Q 작품에 대한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유가족분들이 아니라 시민들을 조명한 이유가 궁금했어요.

정: 처음 계획됐을 때는, 유가족분들이 먼저 시민들 얘기를 해보자. 이렇게 해서 기획됐어요. 우리 얘기만 하지 말고 시민들 얘기를 해보자,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셨어요.

배: 16년 2월에 이 책이 기획됐어요. 그때 4월에 총선이 있는데 분명히 야당이 진다고 말하던 때였어요. 그래서 그때 2017년이 너무 힘들 것 같다는 예상을 했었어요. 당시 부모님들도 대개 혼자라고 느끼긴 하셨지만, 세월호 활동을 같이하는 시민들도 거의 대부분 혼자 활동하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나만 하고 있나’ 이런 생각들을. 나만 미친 것 같지만, 같이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런 것들을 알려야 좀 힘을 내시지 않을까.

Q 인터뷰이에 대한 선정 기준이 있었나요?

스텔라 데이지호 추모 집회에서 만난 배영란 작가. 인터뷰 도중 눈물을 참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윤예준 사진기자 yunyj1@hgupress.com

배: 처음에는 가까운 사람들부터 했어요. 그다음에는 소개를 받았죠. 지역에 계시는 부모님들이 간담회를 하시면서 만난 분들이 계셔서 그분들께 연락을 했었죠. 그렇게 확장시켜서 하느라, 되게 많이 만났고 시간도 좀 오래 걸렸어요.

정: 돈도 많이 들었어요. (웃음) 비행기도 타고 하느라고.

Q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서 해결되지 못한 것들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배: 해결되지 않은 것은 너무 많은데. 침몰 원인도 밝혀지지 않았고요. 왜 구조하지 않았는지가 가장 궁금하죠. 왜 그때. 얼마 전 박근혜 전 대통령은 자고 있었다고 밝혀졌는데. 근데, 그것도 좀 웃기지 않아요? 사람이 앞에서 떨어지려고 하면 무의식적으로 잡는 게 사람인데, 대통령이 자고 있다고 아무런 조처가 내려지지 않았다는 게 전 잘 이해가 안 됐어요.

정: 뭔가 된 것처럼 보이지만 진행된 것은 없거든요. 뭐가 없어요, 아직. 지금 특조위나 이런 것들도 국회에서 하는 건데. 정권이 바뀌었지만 정권 차원에서 하는 건 없어요. 검찰이 따로 조사하고 있지도 않고.

두 작가와의 인터뷰 중 간간이 슬픈 침묵이 흘렀다. 참사 당시를 묘사하는 말이나 유가족에게 벌어질 일들을 설명하는 말들이 내뱉어질 때, 그 누구도 섣불리 반응할 수 없었다. 인터뷰를 끝마치고 세월호 광장 상황실을 나서자 스텔라 데이지호 침몰 사고 추모 집회가 진행 중이었다. 두 작가는 집회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헤어질 즈음, 두 작가의 얼굴에서는 슬픈 침묵이 사라지고 어느새 굳은 의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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