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을 꿈꾸는 목소리 <생각많은 둘째 언니> 기획자 장혜영 씨를 만나다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일상에서 마주하기에 낯선 당신. 대부분 비장애인은 장애인의 존재를 알고 있지만, 정확히 어디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장애인은 철저히 비장애인과 격리된 채 일상을 보내게 되기 때문이다. 일종의 규칙인 듯, 비장애인의 사회는 침묵으로 격리에 동의하고 있다. 이에 반기를 든 사람이 있다. <생각많은 둘째 언니>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장혜영 씨를 만나보자.

평소 여러 책과 시사 문제에 관해 얘기하는 장혜영 씨의 <생각많은 둘째 언니> 채널에 오늘도 새로운 영상이 업로드됐다는 알람이 떴다. 영상을 시청하기 위해 유튜브를 키고 동영상을 재생한다. 제목은 ‘막내랑 창덕궁 봄꽃구경’. 영상은 침대에 누워있는 한 사람을 비추는 것으로 시작한다. 대략 5초 정도 되는 시간이지만, 말투 등을 통해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이 장애를 가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창덕궁 나들이를 함께한 사람은 발달장애를 가진 장혜영 씨의 동생 장혜정 씨다. 유튜브 영상에 장애인이 등장한다는 것이 익숙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생각많은 둘째 언니>, 정제되지 않은 대화를 나누는 곳

Q <생각많은 둘째 언니>는 어떤 콘텐츠인지 간단히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이 세상을 그래도 이해해보고자 노력하는 둘째언니의 채널’이라는 문장이 제 채널을 소개하는 문장이에요. 제 채널은 말 그대로 제가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마주친 수많은 고민의 순간들을 공유하는 곳이에요. 또한, 그 지점에 대한 저의 생각을 가능한 정리하여 지금을 함께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는 온라인의 작은 공간이기도 해요.

Q <생각많은 둘째 언니>가 어떤 고민 가운데 만들어지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제 채널은 자기 자신을 미완성의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숨통을 틀 수 있는 공간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처음 채널을 시작할 때 많은 고민을 했는데, ‘나는 엄청 똑똑하거나 엄청 재미있는 사람이 아닌데’ 하는 고민이었어요. 당시 저에게는 어떤 종류의 위기감이 있었어요. 사람들 사이의 대화, 특히 온라인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대화들에서 각자의 태도는 가지각색이지만 그 태도가 정해지기까지 개인들이 고민하는 지난한 과정은 지나치게 생략되어 있다는 위기감이었어요. 자기 자신을 누군가, 무언가로 정체화하는 것은 실로 오랜 시간과 노력이 걸리는 일이잖아요. 다양한 이슈들에 대한 수많은 대화는 ‘너는 어느 쪽이냐’를 빨리 선택하기를 촉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아직 생각이 마무리되지 않은 사람들은 놀림거리가 되기에 십상이고요.

Q 해당 콘텐츠가 장혜영 씨께도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쳤을 것 같은데요.

약 2년 정도 채널을 소소하게 꾸려오고 있는데요, 2년간 이 독특한 형식의 ‘대화’를 얼굴도 모르는 많은 분과 이어올 수 있었다고 하는 사실 자체가 저에게 주는 울림이 있습니다. ‘새로운 대화란 가능하다!’라는 신념을 갖게 해 준다고 할까요. 대화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를 한 번이라도 더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내 의견이 완벽하지 않아도 대화에 예의를 잃지 않고 참여할 만큼의 준비가 되었다면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도 괜찮으며, 그렇게 대화에 참여하다 보면 나중에는 더욱 풍부한 생각과 그로 인한 행동을 할 수 있게 될 거라는 믿음이 저에게 생긴 것 같아요.

‘익숙지 않은 것’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

 

Q ‘익숙지 않은 것’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 어떠했는지 장혜영 씨의 경험을 여쭤보고 싶습니다.

저는 중증발달장애를 가진 동생과 함께 어린 시절 거의 같이 보냈어요. 학교와 동네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비장애인이었기 때문에, 저와 동생은 어른과 아이를 막론한 수많은 사람의 시선과 질문 공세에 시달려야 했어요. ‘네 동생은 왜 그래?’, ‘네 동생은 바보야?’ 이 질문들은 굉장히 위협적인 것이었어요. 왜냐하면, 제가 이 질문들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저와 동생이 노골적인 공격의 대상이 될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가 판가름 나는 것이었거든요. 그 때문에 저는 동생의 장애 혹은 우리 집의 가난 등의 이유로 누군가의 ‘아래’에 있지 않기 위해 공부를 잘 한다든가 하는 방법으로 상대적 우위에 서는 법을 일찌감치 터득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방법도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했어요. 제 나름의 ‘그들의 기준’에 동화되고자 하는 노력은 결국 ‘잘난척한다’는 부정적인 꼬리표로 다시 돌아왔죠.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은 ‘익숙지 않은 것’은 곧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는 것’ ‘무시해도 되는 것’, ‘공격해도 되는 것’, ‘설령 그 대상이 내 눈앞에 있다 하더라도 그 존재에 대해 예의를 갖추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Q ‘익숙지 않은 것’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가 미성숙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다양한 인간적인 특성들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수 없는 환경에서 이런 다양성에 대한 척박한 감수성이 기인한다고 생각해요. 사람을 능력으로 서열화하고 이에 따라 차등대우하는 것이 당연한 사회잖아요. ‘정상성’의 달성 여부는 삶에 가로놓인 수많은 관문을 통과할 수 있는지 없는지 하는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어요. 그래서 사회적 주류에서 조금만 벗어난 사람들은 마치 ‘루저’처럼 취급되는 것이죠. 이런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가 아닌 것 같아요. 이런 사회는 한껏 경직되어 문제를 해결할 유연함을 잃게 돼요. 결과적으로 문제를 감추기 급급하다가 더이상 감출 수 없는 시점에서 문제가 곪아 터지게 되면 이에 대한 사회적 책임 역시 그때그때의 ‘항변할 수 없는 자들’에게 덮어씌울 뿐 본질적인 해결을 추구하는 것은 몹시 어려운 사회라고 생각해요.

모두의 공존, 가능할까?

 

Q 앞만 보고 내달리는 이 세상에서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이 ’공존’ 하기 위해서 어떤 것들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갖춰져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사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가 가진 ‘권력’을 각성하고 그 자체에 대한 경각심을 갖는 것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해요. 연령, 성별, 지역, 빈부를 막론하고 이 사회의 모든 사람은 다 이 사회의 거울이지요.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나’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할 수는 없을 거예요. 하지만 아무리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의 ‘한 사람의 시민 됨’이 침범받을 때 자신의 시민 됨이 침범받는 것처럼 느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싫어하는 마음을 갖는 것과 그 싫은 마음을 특정한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는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기 때문이에요. 민주적이며 다양성이 공존하는 사회에서는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를 싫어하는 마음을 과시하는 행위란 부끄러운 것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Q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좀 더 듣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자기 내면의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싫어하는 마음’에서 생각을 시작해본다면 어떨까 해요. 요즘 읽고 있는 책 가운데 <차별감정의 철학>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다양한 의미로 상당히 과격한 책이지만, 저자의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마음 한켠이 뜨끔해지는 부분이 분명히 있더라고요. ‘누군가를 싫어하는 마음’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좋지 않으며 오히려 그 ‘싫어하는 마음’의 정체를 눈 부릅뜨고 들여다봄으로써 바로 그것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는 메시지를 주는 책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자기 내면의 싫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차별 발언이나 행위로 연결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공존의 세계를 위한 좋은 실천이라고 생각해요.

상대방에 대한 공감과 배려가 척박해진 시대다. 흔히 ‘정상’의 범주 안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존재를 지움 당한다. 수많은 배제와 냉담 속에서 ‘공존을 꿈꾸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 속에서 사회 구성원 모두의 공존이라는, 거대한 꿈을 얘기하는 장혜영 씨. 어쩌면 우리 모두의 공존이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그를 만나고 내 마음에도 조그마하게 새로운 희망이 꽃피었다.
 

사진출처 유튜브<생각많은 둘째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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