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에치던 방> 이완민 감독을 만나다

▲ 정지현 영화칼럼리스트(왼쪽)와 이완민 감독(오른쪽)이 당일 진행된 씨네토크에서 관객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본지 5면은 ‘너는 나에게로 와 꽃이 되었다(이하 너나꽃)’라는 제목의 인터뷰 면으로 채워집니다. 너나꽃은 인문학 작품의 제작자를 만나 이야기를 듣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본지는 너나꽃을 통해 대다수 한동대 학생들과 접점이 없는 타인의 삶을 조망하고자 합니다. 너나꽃이 ‘너’가 ‘나’에게로 와 ‘꽃’이 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누에치던 방>은 채미희와 조성숙의 만남과 그 이후에 대한 이야기다. 처음 만났지만, 단짝인 관계. 그게 바로 미희와 성숙의 사이다. 미희는 사법고시에서 떨어지고 남자친구와 헤어진다. 미희는 벼랑 끝에 매달린 사람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그러던 중 미희는 지하철에서 만난 여고생을 무작정 따라간다. 이름 모를 여고생은 한 집으로 들어가고 미희는 며칠 뒤, 그 집의 초인종을 누른다.

“지하철에서 어떤 여고생을 만났거든. 근데 그 여고생의 얼굴에 상처가 하나도 없어 보이더라고. 그게 아주 오래전 내 모습 같았어.” (극 중 채미희 대사)

미희는 처음 보는 성숙에게 ‘우리 고등학교 시절, 단짝이었잖아’라고 말한다. 성숙은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미희는 그렇게 성숙과 친구가 된다. 미희는 성숙과 한 집에 사는 익주와도 알게 되고, 익주로부터 김유영에 대해 듣게 된다. 유영은 익주와 성숙의 아픈 상처다. 고등학교 시절, 자살했기 때문이다. 미희는 성숙과 관계를 맺어가며 점점 다르게 행동하기 시작한다. 미희는 과거 자신이 일방적으로 단절을 선언했던 사람들을 찾아간다. 자신을 억압했던 부모에게 심하게 화를 내기도 한다. 그렇게 미희는 과거를 되짚어 보며 마음속 상처로 남은 관계를 매듭지어 보려 한다.

어떻게 해석할지는 관객의 몫이다

지난 13일,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에서 열린 씨네토크 때 이완민 감독은 <누에치던 방>을 이렇게 묘사했다. “먼저 이렇게 얘기하고 싶어요. 이 영화는 패키지 여행보다는 배낭 여행에 가깝다. 소설보다는 시에 가깝다. 정밀화보다는 인상화에 가깝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요. 관객 몫이 많다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긴장하며 보는 것이 아니라 스윽 하고 가볍게 둘러봐도 된다는 생각에 뻐근했던 목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이 감독은 작품에 두 축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누에치던 방>은 완벽하게 현실적으로 해석될 수도 있으며 동시에 비현실적으로, 관념적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궁금해지는 것은 바로 여고생의 존재다. 미희가 지하철에서 만난 여고생과 성숙의 옛친구 유영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배우가 1인 2역을 한 것이다.
먼저, 현실적으로 해석해보자. 유영과 여고생은 전혀 다른 인물이며 공교롭게도 두 인물이 비슷하게 생겼을 뿐이다. 미희가 여고생을 홀린 듯 따라간 것은 스스로 말한 대로 일종의 질투 때문이다. 성숙이 있는 집의 초인종을 누른 것은 집을 착각한 채미희의 실수였고, 우연인 것이다. 너무나 많은 우연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모르죠. 걔가 좀 욱하는 데가 있었거든요. 정념적인 사람들한테 있는 그런 거. 그냥 성격인 거죠. 타고나는 거.” (극 중 김익주 대사)

반대로, 과거 유영과 현재의 여고생이 동일 인물이라면 영화는 전혀 다르게 해석된다. 여고생은 일종의 유령 혹은 정념 그 자체가 된다. 미희는 입시의 실패, 취업의 실패 등으로 정념을 잃어버린 존재다. 지하철에서 미희가 여고생을 쫓아간 것은 정념에 대한 갈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고생이 유영의 환영이라고 비현실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하면 영화가 전체적으로 관념적으로 다가온다. 미희는 정념을 잃어버린 현대인을 표상한다. 관계에 서툴고 여유를 잃어버린 현대인.

과거를 찾아가는 여정

해석의 갈래가 다양한 이 영화는 어떻게 탄생하게 됐을까? 이 감독은 ‘내 안에 질문이 있었고, 그게 영화 연출에 투영됐다’라고 설명했다. “질문이 있었어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같은 사람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거든요. 그게 마음의 지도를 그려가는 주요한 질문 중 하나였죠. 과거를 현재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봐야 할지, 아니면 그게 환상에 지나치지 않는다고 치부해야 할지 고민했어요.”
이 감독은 <누에치던 방> 작업은 ‘마음의 지도를 그리는 일이었다’라고 말한다. “영화의 시작은 일단 제가 자격이 되는 만큼만 일을 시작해보자 였어요. 마음의 지도를 그리는 과정에서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인상들을 발견했어요. 제가 좀 괴물 같았던 순간들. 그리고 너무 늦게 됐지만 ‘미안하다’라고 말하고 싶은 그런 것들을 좀 다시 꺼내보고 싶었어요. 그냥 이 영화가 (저에게) 재료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나를 정확하게 보면 다른 사람도 잘 보일 것 같았고, 많은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미희가 성숙을 만나 서툴고 삐뚤거리지만 과거를 더듬어 간 것처럼, 이 감독은 마음의 왜곡을 직면해본 것이다. 

마음 한 켠에 자리 잡은 단절

친구와 싸우고 나서, 자기 전 뒤척여 본 적 있을 것이다. 혹은 친구에게 심한 말을 하고 뒤돌아서 후회하지만 민망한 탓에 그냥 넘긴 적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한 번쯤 가지고 있는 경험이다. 수많은 타인을 만나지만 서로를 대면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시대다. 관계에 허둥대는 시간이 낭비처럼 여겨진다. 관계에서 생긴 상처를 애써 무시하고 넘어간다, 아물지 않았음에도.

“다들 어찌나 방어하고 사시는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 다들 엄격해가지고. 선생님, 씨, 선배. 복잡해. 다 그냥 서로 반말하고 살면 안 되나? 왜 그렇게 다들 거리를 두려고 그러냐고. 나는 네가 우리 집에 처음 왔던 날 첨부터 반말해줘서 너무 좋더라.” (극 중 조성숙 대사)

‘타인을 진심으로 대하는 법’, ‘관계 속에서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법’, ‘단절된 관계를 다시 복구하는 법’ 등을 배운 적 있는가? 그런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됐다. 어렸을 적부터 시작되는 경쟁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눈 돌리기 힘들게 됐다. 경쟁이 완화되고,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생기면 그제야 말한다. ‘어떻게?’
최근에 발생하고 있는 뉴스 이슈들을 살펴보자. 생을 마감한 지 일주일이 돼서야 발견된 독거노인. 어린아이들이 저지른 일이라고 믿기 힘든 끔찍한 학교 폭력. 왜 이런 일들이 생기는 것일까?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 것일까?
이 감독은 씨네토크에서 ‘단절의 책임이 개인에게만 있는 것일까’하는 의문이 들었다고 말했다. “늘 경쟁해야 하고, 입시라든지 취직이라든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무언가를 하다 보니까 시간이 이렇게 흐르는지 몰랐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렇게 늦게 과거와 직면하게 됐는데, 그게 또 나 개인만의 탓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제 개인적인 성격도 있겠지만 다른 어떤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도 있었다고 보거든요.”

미희는 성숙과 함께 관계를 맺어가며 서서히 과거의 단절을 풀어가 보려 한다. 미희는 고등학교 시절 자신이 일방적으로 절교를 선언한 근경에게 찾아간다. 그러나 영화는 막연하게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근경은 직장으로 찾아온 미희에게 ‘스토커 짓 그만해. 이제 와서 우리가 뭘 더 어떻게 할 수 있겠어’라고 소리친다. 그리고 암전되며 영화가 끝난다. 영화의 결말이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이 감독은 전혀 반대의 말을 한다. “글쎄요, 좀 당황스러울 수 있지만 그래도 되게 긍정적이지 않아요? (웃음) 그래도 이제 그만큼 까지는 간 거잖아요.” 그렇다, 그렇게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사진제공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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