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담은 (국제어문, 13)

늘 굳건하리라 생각했던,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땅이 흔들리고 익숙한 공간이 무너지는 경험은 본능에 가까운 공포심을 일깨웠다. 살면서 겪어보지 못한 강력한 지진에 나는 혼비백산하여 원룸을 뛰쳐나왔다. 마음을 진정시킬 새 없이 계속하여 여진이 왔고, 나는 상황에 대비되어있지 않은 채, 위험한 도로와 길들에서 헤매었다. 나를 가장 두렵게 한 것은 앞으로 언제, 얼마나 땅이 더 흔들릴지 모른다는 상황의 ‘불확실성’이었다. 진원지에 가까워 피해가 심각했던 학교는 휴교령을 내렸고, 나는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탔다.
집에 와서도 지진의 후유증으로 아이들이 쿵쿵거리며 뛰는 진동에, 혹은 사이렌이나 경보음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게 되었고, 친구들은 집과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꿈으로 잠을 설쳤다. 제대로 공감해주지 못하거나 잘못 공감해주는 주변의 반응, 호기심 어린 악의 없는 질문들에도 우린 마음의 상처를 받았고, 지진을 함께 겪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불편해졌다. 그중 가장 불편했던 것은 우리에게 일어난 재난에 대해 멋대로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을 하려는 시도들이었다.
가장 대표적으로 한동의 인권학회에서 주최하려다가 취소된 퀴어신학 세미나를 지진의 원인으로 돌리는 무례한 가설은 나를 여러 측면에서 화나게 만들었다. 고난의 당사자이기도 한 그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상처를 가중시키고, 또 다른 상처를 만드는 잔인하고 근거 없는 비난이었다. 또한, 재난의 원인을 죄로 돌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의미와 값어치를 퇴색시키는 동시에, 인간이 함부로 단정 지어서는 안 되는 하나님의 뜻의 영역을 침범한 발언이었다. 마지막으로, 고난 가운데 있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일은 또 다른 사회적 소수자를 타깃 삼아 그들을 핍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해하기 힘든 많은 고통을 인식의 한계 내에서라도 이해해보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인간다운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희생양 삼아 억지로 만들어내는 인과응보식의 해석은 경솔하고 타인의 고통에 무신경하며 기독교의 정신에도 반하는 힐난이다. 이번 지진의 사건을 통해 우리 자신도 언제든 사회적 약자, 소수자 및 재난의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역사를 통틀어 약자를 대상으로 되풀이되어온 차별적 만행을 우리가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고난의 의미는 공포와 두려움이 진정되고,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랑과 치유의 과정이 지난 다음, 우리 스스로가 찾아내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지진이 우리 개개인에게 주는 메시지는 다양할 것이다. 나를 비롯한 많은 친구들은, 지진을 통해 사실 우리가 얼마나 학교를 사랑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는 느낌을 나누었다. 학교를 정상화시키기 위한 교직원들, 교수님들, 총학생회 및 많은 한동의 관계자들의 수고와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위로와 응원의 메세지는, 심란한 마음에 진심 어린 위로가 되고, 다시 학교로 돌아올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이 되었다. 재난을 겪고도 그것으로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무너진 것을 복구하고, 서로 위하며, 이런저런 의미를 또 만들어 내는 인간의 모습이 참 아름답다고 나는 생각했다. 시간이 흘렀지만, 조금의 진동, 혹은 여진에도 우리는 깜짝깜짝 놀라며 함께 불안해 할 것이다. 또 지진이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미래의 불확실성을 함께 감수하며 다시 일상으로 복귀할 것이다. 나는 그 모든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우리가 서로의 온기와 존재를 더욱 귀히 여기고 더 깊이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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