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 나름의 힘듦을 안고 다사다난한 이번 학기를 달려온 모두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전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지척에 두고 살아도 상대방에 대해 완벽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타인이기 때문에 닿으려고 손 뻗어도 닿지 못하는 영역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옆에 있는 이에 대해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서로가 공감하는 데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관심, 경청 그리고 배려 등의 몇 가지 준비물을 챙기고 마주 앉으면 우리는 잠깐이나마 서로에게 닿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감수성’은 역시 준비물 중 하나입니다. 감수성의 사전적 정의는 외부 세계의 자극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성질입니다. 감수성이 적은 사람은 스스로 판단하는 정의를 들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일을 남에게 강요하기도 합니다. 다른 이의 희생을 목표로 도달하는 당연한 과정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저 역시 타인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감수성 적음’의 특성을 가졌습니다. 어디까지가 폭력이고, 어디까지가 조직 운영을 위한 비판인지. 행여 나의 특성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폭력적으로 다가가게 될 것 같아 대표자가 되는 것이 참 무서웠습니다. 한동신문사라는 집단에서 과연 어떤 대표자가 됐는지는 구성원의 판단에 맡겨야 하겠습니다.
‘감수성 적음’이라는 특성은 대표자가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대표라는 자리를 *역할이 아니라 *권리로 받아들이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표자가 직함을 어떻게 인식하는지는 집단의 분위기를 좌우할 만큼 공동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대표자가 자신의 위치를 갑을관계의 ‘갑’, 상하관계의 ‘상’으로 인지하는 것은 그 집단의 재앙일 수 있습니다. 대표자는 마땅히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직함과 관계없이 책임에 따른 비판을 주고받고 있는 가를 살펴야 합니다. 쌍방간의 비판이 불가능하다면 그 관계는 수평적이라고 보기 힘들 것입니다.
감수성은 노력해야 얻을 수 있는 성질이 아닐까 싶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기독교인이 아닌 친구와 신앙에 관해 얘기 나눈 적 있습니다. 저는 신념도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아무리 그래도 죄는 죄야’라는 말을 반복했고 저는 친구와 끝내 의미 있는 논의를 진행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서로 닿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의와 타인의 정의가 다를 수 있음을 의식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나 자신의 진리와 타인의 진리가 다를 수 있음을, 나의 진리와 다르더라도 타인의 진리가 틀린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의식적으로 수긍하는 것. 그렇게 조심스럽고 정중하게 서로에게 다가설 때 우리는 비로소 닿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 학기간, 부족한 대표와 함께 한동신문을 만들어 준 기자들과 다양한 제보와 비판 그리고 관심을 보내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드립니다.

*역할: 자기가 마땅히 하여야 할 맡은 바 직책이나 임무.
*권리: 권세와 이익. 어떤 일을 행하거나 타인에 대하여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힘이나 자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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