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끔하게 차려입고서 생활관 문을 8학기째 나서고 있는 내가 이제는 익숙하다. 8학기 동안 생활관을 벗어나지 않을 줄 새내기 때의 나는 몰랐겠지만 말이다. 아침마다 바지런히 버스를 타고 말 그대로 ‘등교’하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었기 때문일까. 어찌 되었든 요즘은 나만큼 이렇게 생활관에 정 붙이고 사는 사람도 요즘은 흔치 않다.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이야기, 생활관이 그저 잠만 자는 곳이 아니라는 말이 그저 좋았다. 어쩌면 차게 느껴질 수 있는 생활관이 또 다른 배움터가 된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생활관은 어련히 그저 잠만 자는 곳이어서는 안된다. ‘학문’과 ‘신앙’의 통합을 입 아프게 말하는 학교라면, ‘삶’과 ‘배움’의 통합도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네 신앙과 배움이 우리 매일의 삶에 그 적(籍)을 두고 있지 않다면, 그 어찌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이라 하겠는가. 굳이 ‘생활관’이라 이름하는 우리의 쉴 터는 마땅히 생활하며 배울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함께 삶’의 의미는 당연히 그저 하나의 공동체라는 의미 이상을 가지게 되며, 몸을 부대끼며 서로가 서로에게 배울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는 단초가 된다. 팀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생활관은 무작위로 꾸려진 사람들과 관계하는 법을 가장 쉬이 배울 수 있는 장소가 되며, 모든 팀 활동의 시작이 생활관부터라는 사실은, 이 장소가 말뿐인 공동체 리더십을 삶으로 살아내게 하는 언행일치의 장소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RC를 인성, 지성, 영성 교육의 집합소라고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RC에 대한 지원과 계획이 뚜렷해야 할 것이다. 하용조관에 대한 RC 편성은 아직 정해진 것이 없고, 근근이 쿼터제로 그 정원을 유지할 뿐이다. 정해진 생활관 수용률을 채우기 위해 ‘삶’과 ‘배움’의 일치가 뒷전이 된다면, 그렇게도 이야기하는 RC와 생활관은 그저 껍데기뿐인 곳으로 전락할 것이다.
RC 제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생활관은 더 큰 반환점에 서게 되었다. ‘입주 3년 의무화 방침’에 대한 공지와 소통의 과정을 통해 학교가 생활관을 바라보는 입장을 엿볼 수 있었는데, 실은 이 과정 자체에 대해 큰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거주’의 문제는 개개인의 생활에 굉장히 결정적인 사안이다. 이러한 섬세하고 깊은 고민이 필요한 작업을 학생 사회의 의견 반영 없이, 특히 이미 입학한 학생들에 대한 고려 없이 시행한다는 것이 어불성설 아니겠는가.
덧붙이자면, 각자의 사정으로 생활관에 거주하지 않는 사람들을 탓하지는 말아야 한다. ‘의무’라는 방침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생활관에 거주하는 학생들의 권리가 증진돼야 하고, 생활관에 도저히 살 수 없어 외부에서 거주하기 원하는 학생들의 권리 보장 또한 철저해야 그 정책적 정당성이 유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관계 맺고, 성장하는 생활관을 원한다면, 그에 맞는 마땅한 제도적 변화와 실거주자인 학생들과의 충분한 관계, 소통이 우선되어야 한다. 분명 우리네 생활관은 완벽하지 못하지만, 함께 모여 쌓아가는 좋은 터전이 되기 충분하다. 이제는 ‘생활관’에 ‘생활’하는 마땅한 사람으로 살아왔는지 우리가 스스로에게 되물어 볼 때다.

장명성 (언론정보, 13)

저작권자 © 한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