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한동대에서 ‘한동 순교 20주년 기념대회’가 시작됐다. 20년 전 선교를 떠났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한 한동대 동문 선배와 교수를 추모하는 대회였다. 누구에게는 선교와 순교가 들어본 적 없는 먼 나라 얘기일 수도 있고, 다른 이에게는 인생을 바칠 만큼 뜨거운 소명일 수 있다. 각 개인마다 다르게 다가오는 선교 혹은 순교, 김완진 목사에게 그 의미를 물었다.

▲ 순교와 선교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는 김완진 목사 최용훈 사진기자 choiyh@hgupress.com

순교, 그 모호한 경계

Q ‘순교’가 무엇인지부터 여쭤보고 싶어요.

예전에는 흔히 적색 순교를 순교라 칭했지. 기독교가 로마제국에 급격하게 퍼져나가기 시작하면서 나타난 제일 독특한 현상 중 하나가 순교였어. 네로 황제로부터 말미암아 로마 시내의 삼 분의 일이 불타는 로마 대화재가 발생하는데, 이때 네로가 화재의 주범으로 누구를 주목했냐 하면 그 당시 기독교인들. 기독교인들이 로마제국에서 굉장히 이단적인 사상을 가졌었거든. 박해가 시작되게 되는데 처음에는 주로 로마 인근의 시내에서만 행해지다가 점차 제국적인 차원에서 박해가 이뤄지게 됐지. 이때의 순교가 흔히 말하는 적색 순교야. 말 그대로 신앙의 고백 때문에 생명이 위기에 처하거나 생명을 잃게 되는 것.
이제는 이런 순교는 벌어지면 안 돼. 초기 기독교는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졌어. 한국도 마찬가지야. 기독교가 처음 세워진 곳에서는 항상 순교자의 피가 뿌려졌어. 문제는 현대사회가 된 거야. 현대사회에서 뭘 비교할 수가 있냐면 2007년에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이 벌어져. 이슬람 극단주의자 조직원들에게 납치를 당해. 목사님과 형제 두 명이 참수를 당해서 죽어. 몸값을 요구했고, 그러나 테러범들과는 협상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우리나라도 따르지. 내가 생각하기에 국민의 생명권이 위험한 상황이면 국가는 구해줘야 하지 않나, 어떤 상황이 됐건. 그렇지만 그때 당시는 오히려 비난을 당해. 왜 이렇게 위험한 곳에 갔냐고. 그리고 그 이듬해부터 개신교 선교 활동이 급격하게 쇠락해. 이후 기독교 선교의 근본적 가치와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난하는 성도들이 늘기 시작했어.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웃는 자들과 함께 웃고, 이것이 바로 기독교 정신인데 말이야. 그런데 이것과 별개로 이제는 흔히 말하는 적색 순교를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현대사회에서 순교에 대해 재정의할 필요가 생긴 거지.

Q 순교를 재정의한다는 말이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어요.

꼭 피 흘려 죽어야만 순교인가. 왜냐면 내가 지금까지 얘기한 순교는 모두 적색 순교야. 흔히 말하는 피 흘림의 순교. 누군가는 죽는 일이 발생한 거지. 우리 국민이 다른 나라에 들어가면 어떤 이유에서든 죽으면 안 되는 일이야. 현대사회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순교라는 차원을 넘어서 외교적 문제가 벌어지고 국가적 문제가 벌어지고, 그 가족에게는 아픔이 되는 일이거든. 그래서 한국 개신교에서는 현대사회에서 ‘순교를 어떻게 재정의하는가’에 대한 이슈가 떠올라. 교단마다 순교에 대한 정의도 다 달랐거든. 그 내용을 잠깐 내가 정리한다면은, 순교가 무엇인가. 예수에 대한 복음을 믿고 증언하다가 그 증언 때문에 고난을 겪다가 타협이나 배교로 죽음을 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고 기꺼이 자신의 기독교적 신앙을 위해서 죽음을 선택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 이것이 순교의 기본적인 정의야. 이해됐지?

Q 정의를 길게 말씀해주셨는데, 이 요소 중 하나라도 해당하지 않으면 순교가 될 수 없는 건가요?

일단은 자신의 신앙적 고백 때문에 죽임을 당한 사람이야. 두 번째는 죽음이 복음 증거와 수호를 위해 불가피했어. 이해됐지? 두 번째 같은 경우는 첫 번째와 다르게 박해자가 존재해야 하는 거지. 앞에 개념과 큰 차이는 없어. 핵심 개념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고백, 그리고 그로 인한 죽음.
간단히 요약하면, 이전에는 순교를 적색 순교만 봤다면 조금씩 확대하기 시작했어. 순교자와 순직자로 나눠. 순교자는 말 그대로 죽임당한 사람들. 순직, 기독교 증언을 담당하는 일을 하다가 그로 인해서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거나 그 일로 말미암아 병들어 죽는 경우. 이건 백색 순교라고 불러. 타살당하진 않았지만 거룩한 일을 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혹은 병에 걸려 죽는 케이스를 백색 순교라고 부르게 됐어. 이건 인정하는 곳도 있고 인정하지 않는 곳도 있어. 진짜로, 적색 순교만을 순교라는 하는 곳도 있어. 교단마다 조금씩 달라. 이게 ‘순교는 뭐다’라고 명확하게 정의 내리기 조금 힘들거든. 대부분은 백색 순교도 순교로 보고 있어. 그래서 이제 영민이와 경식이가 피지에서 아웃리치 갔다가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잖아. 한동대는 후자의 경우도 선교로 인정한 경우가 되는 거지.

선교는 의무인가

Q 선교라는 것도 역시 정의 먼저 여쭤보고 싶어요.

전도와 선교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니? 전도와 선교의 가장 낮은 차원의 경계는 바로 문화권을 넘어가는 거야. 배 타고 나가고, 비행기 타고 떠나야 다 선교라고 생각하는데, 타 문화권을 넘어가는 것을 선교라고 해. 네가 예수를 모른다고 생각해보자. 내가 너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전도야, 타 문화권을 넘어간 것이 아니니까.
종교는 선교적 종교가 있고, 비선교적 종교가 있어. 비선교적 종교는 말 그대로 선교를 하지 않아, 타 문화권을 넘어가지 않아. 왜? 대표적인 종교가 힌두교거든. 힌두교는 다신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 혹은 다신 주의. 이건 범신론이랑 다른 거야. 범신론은 모든 게 신이라는 것이고, 다신론은 신이 많은 거야. 불교는 범신론에 속해. 범신론에 따르면 이 방안에도 (신이) 한 삼사백 개쯤 될걸. 형광등 신, 거울 신, 책 신, 컴퓨터 신도 있어. 불교와 힌두교는 비선교적 종교야. 전도할 필요가 뭐가 있니? 너도 성불하세요, 나도 성불할 테니. 모든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는데 선교할 필요가 없는 거지.
기독교는 반대야. 선교적 종교야. 기독교가 동일 집단에게만 머물지 않도록 타 집단권에도 기독교 복음이 전해지기를 갈망해. 예수가 마지막 승천하면서 한 얘기도,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들과 아버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에게 분배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게 예수의 마지막 명령이야. 마태복음 종결 구절이거든. 기독교 복음의 선교적 가치가 예수의 마지막 명령이야. 교회는 그 선교적 가치 위에 서 있는 것이고, 그래서 전도를 하는 것이고.

Q 기독교 종교에서는 선교 혹은 전도가 의무라고 볼 수 있는 건가요?

필수, 의무라고 하기보다는 기독교의 근간이야, 기독교가 존립하는. 기독교가 존재하는 곳에는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는 것이지. 근간이고 당연히 해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의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러면 하기 싫어도 해야 한다? 의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용어적 표현 때문에 나는 의무라는 말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

순교 기념대회, 왜?

Q 한동대는 왜 이런 순교 기념대회를 여는 건가요?

한동대는 교회가 아니잖아. 한동대는 학교야 학교. 고등교육기관. 근데 거기에 기독교가 붙었잖아. 기독교의 신앙적 가치를 기본으로 두고 그 위에 고등교육을 하는 것이 기독교 대학이야. 기독교도 중요하고 대학도 중요해. 신앙을 가지고 학문을 막거나 학문을 가지고 기독교적 신앙을 억누른다는 것은 맞지 않아. 기독교 대학은 훨씬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해야해. 그것을 학문과 신앙의 통합이라고 불러.
한동대학교는 누구도 시키지 않았는데 초기부터 계속 꾸준히 선교를 나가. 기독교 문화라는 요소, 경영이라는 학문적 요소 등을 기독교 신앙과 결합해서 계속해서 선교를 나가고 있지. 교수가 시키고 총장이 시킨 것도 아닌데 매년 그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 그 다섯 명의 한동대 사람들이 선교활동을 하던 중 백색 순교를 당했던 것을 굳이 기억하는 것은 이 사람들이 죽었다, 그것이 목적 자체는 아닐 거야. 이 사람들이 죽었다, 넋을 깃들자. 그것은 바깥에서 하는 것이고. 그 사람들이 과연 무엇을 하다가 백색 순교로서의 부름을 받았나. 맞다. 선교적 활동을 통해 활동하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이 사람들을 기억하며 기독교의 선교적 가치를 잃지 말자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겠지.

Q 마지막으로 한동대 학생들에게 한마디 하신다면.

선교도 중요하고 순교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선교적 삶과 순교적 삶을 사는 것이야. 그걸로 마감하자. 선교적, 순교적 삶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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