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이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말은 곧 우리의 기독교 신앙이 세상 문화 안에서, 세상의 문화와 함께, 그리고 세상 문화에 의해서 신앙의 성격과 내용이 달라진다는 의미입니다. 신앙의 내용이 Content라면 그 신앙을 적용하는 세상은 Context입니다. 포도주와 포도주 부대와의 관계와 같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의 두 가지 잘못된 신앙의 태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신앙의 탈속화 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의 세속화입니다.
신앙의 탈속화란 세상의 문회에 의한 신앙의 변질이 두려워 세상을 등지는 태도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반면에 신앙의 세속화는 세상 속에서 살면서 신앙이 세상 문화에 흡수되어 그 본질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세상을 떠나도 안 되고 세상에 의해 신앙을 잃어도 안 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 속성 자체가 세상 안에서 발전하고 깊어지고 넓어지며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한 알의 씨앗이 땅속에서 파묻혀서 그 씨앗의 생명력이 살아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는 말씀의 의미를 단지 세상 안에서의 기독교인의 윤리적인 말씀으로 해석합니다. 물론 맞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기독교 신앙의 속성은 세상 안에서 신앙 자체가 활성화하고 생명력을 얻게 되어있습니다. 즉 기독교인들이 교회 안에서 말씀과 예배와 친교를 통해서 신앙의 성장과 생명을 얻듯이 기독교인은 세상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앙의 생명력을 얻게 되어있습니다. 단지 교회 안에서 신앙의 생명력을 얻는 것과 세상에서 신앙의 생명력을 얻는 것에 방법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독교인의 신앙은 복음으로 세상을 살리고 동시에 세상에 의해서 신앙도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도 세우시고 사랑하시지만, 이 세상도 만드시고 사랑하십니다. 교회와 세상의 관계 혹은 신앙과 세상의 관계는 마치 배와 바다와의 관계가 같습니다. 배가 바다에서 침몰과 파도가 두려워 들어가지 않으면 신앙의 탈속화가 되기 쉽고, 반대로 세속의 파도와 풍랑에 의해서 침몰이 되면 신앙의 세속화가 되는 것입니다. 즉 배가 바다에 들어가지 않으면 배의 존재 목적과 존재 가치가 상실되고 반대로 배가 바다에 침몰당하여도 배의 존재 목적과 존재 가치가 상실되는 것 같이 ‘신앙의 탈속화’와 ‘신앙의 세속화’는 모두 기독교와 복음에 존재가치와 존재목적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인이 세상의 문화 안에 살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Paul Tillich 신학자가 말하기를 ‘종교는 문화의 뿌리요 문화는 종교의 꽃이다’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인은 신앙과 복음으로 개인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꽃을 피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독교 신앙이 개인과 사회 문화의 근본이 되어야 합니다. 즉 개인이나 문화적인 가치관 세계관에 기독교 신앙이 근원이 되게 해야 합니다. 복음이 하나님의 말씀의 모든 것의 본질이며 원리임을 제시하며 깨닫게 해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기독교의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 본질이 세상의 문화에 의해 구체화하고 실현되고 활성화해야 합니다. 영이 물질화하고 사실화(Actualize)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세상을 변화(Transform)시켜야 합니다. 즉 신학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기독교의 절대적인 진리가, 복음이 세상을 향하여(To), 세상 안에서(In), 세상에 의해서(By), 그리고 세상을 위하여(For) ‘성육화’(Incarnation)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다양화 시대 글로벌 시대입니다. 그 결과 모든 것이 상대화하고 다원화해가는 시대입니다. 즉 복음의 절대적 진리됨이 상대화되어 종교 다원주의가 팽창하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상대주의 문화 속에서 복음의 절대성을, 진리의 보편성을 가르치며 보여주어야 하는 사명이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있음을 명시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복음이 상대화하고 하나님 말씀의 보편적 진리가 세상에 의해 상실됨을 알아야 합니다. 보다 구체적인 복음의 절대성과 보편성의 문제는 다음호에 계속하겠습니다.

교목실 최정훈 교목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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