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 왼손잡이를 이해할 수가 없어. 잘 있는 오른손을 두고 왜 굳이? 선천적인 사람도 있다지만 스스로 된 사람도 있고. 어쨌든 자기 선택이지. 나중에 내 자식한테 왼손잡이 낌새가 보이면 너무 슬플거야. 그 애가 오른손을 쓰게 도와주고, 기도할 거야.
나는 학우들의 등록금으로 만든 이 지면을 빌어 감히 차별금지법에 찬성한다. 이런 글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한동에는 동성애가 끼칠 영향과 본인의 믿음을 바탕으로 동성애, 차별금지법은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주류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악’영향이 얼마나 터무니없고, 동성애보다 심한 문제가 얼마나 많은지는 다른 이에게 설명을 맡기고 오늘 나는 동성애가 과연 죄인지 묻는다.
동성애가 창조 섭리에 어긋나서 죄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인간은 비행기로 하늘을 날며, 가짜 아가미를 달고 물에 들어가 생명을 구한다. 그들은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항문 성교, 콘돔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또, 몇몇은 성경 인용을 즐긴다. "남자와 교합하면 안 된다(레 18:22)." 레위기에는 당시 유대에서 죄로 여겨지던 것이 나온다. 먹는 것과 먹지 않는 것을 규정하고 머리 끝을 둥글게 깎지 말라 한다. 그 후 예수는 사람을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했다. 그래서 현대의 우리는 말씀을 기원전 중동의 상황에 맞춰 해석한 채 부정한 짐승을 먹고, 수혈을 받고, 합성 섬유를 입는다. 한 가지만 빼고 말이다.
이제는 동성애에 관한 구절 또한 해석을 해보자. 고대 근동의 성전에는 매춘을 하는 ‘창기’가 있었다. 지금같은 의미가 아닌, 바쳐진 사람이라 불린 직업이었다. 창기와의 성행위는 풍요를 비는 의식이었다. 그러므로 레위기, 고린도전서는 그와 성행위를 함으로 다른 신께 드리는 제의에 대한 경고다. 다른 해석은 남자아이에 대한 매춘에서 나온다. 오나니즘(창 38:10)때문에 권력과 돈을 가진 남성들이 가난한 남자아이를 산 뒤 그 몸에 정액을 배출함으로 ‘정액을 버리지 말라는 말씀을 지켰다’는 합리화를 꾸짖음이다.
장황하게 이야기했지만 해석에 대한 논쟁을 원하는 게 아니다. 다만, 다른 해석과 이해도 엄연히 존재한다는 말이다. 어쨌든 동성애가 죄라면 어차피 우리는 모두 죄인이며, 죄가 아니라도 각자 다른 죄를 짓는다. 그렇다면 교회는 왜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내가 지을 리 없는 죄에 대해서는 엄격하고, 지켜야 하는 것에는 관대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할 때다.
영화 <밀양>에서 교회는 신애에게 아들을 죽인 자를 용서하라고 말하거나 설교하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온전히 신애에게 맡기고 함께 있어 준다. 내가 가던 교회는 부동산 투기를 하는 박 집사께 그만하라 하지 않는다. 식사 준비는 여전도회가 하라는 남성을 꾸짖지 않는다. 그러나 동성애를 혐오하는 얘기는 쉽다. 내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동성애가 나의, 부모의, 형제, 자매, 친구, 이웃의 이야기가 될 때 비로소 교회에 동성애자가 없는 것이 차별금지법을 막는 것보다 심각하게 느껴질 것이다.
결국엔 사랑이 문제다. 서로 사랑하는 그들,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 우리가 문제다. 그 문제는 내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예수는 말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 나는 간절히 물었다. “자유한국당, 여혐러, 호모포비아는 빼고요?”

언론정보12 강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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