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맞은 봄이라 더욱 반갑다. 추운 밤마다 촛불을 밝히던 광화문에도 봄은 왔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결국 임기를 채 마치지 못하고 4년 만에 청와대에서 물러났다. 민주주의의 승리였고 국민의 승리였다.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온 지 133일 만의 일이다. 파면 선고의 기쁨에 젖는 것도 잠시, 책상에 앉아 박 전 대통령의 대선 출마 공약집을 뒤적였다. 박 전 대통령이 무슨 약속을 하고 대통령이 됐는지, 그중에 과연 지켜진 게 있는지 궁금해서였다. ‘세상을 바꾸는 약속, 책임있는 변화.’ 공약집의 제목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이 공약들을 지키기 위해 ‘정치생명을 걸겠다’고 했다. 말이 씨가 된다더니. 역시 옛말은 틀린 게 없다.
박근혜 정부의 공약 이행 역시 속담으로 표현이 가능하다. 먼저 박근혜 정부 공약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는데, 이걸 조금 더 고급지게 표현하면 ‘표(票)퓰리즘’이라고도 할 수 있다. 표를 얻기 위해서라면 그 공약이 실현 가능한지 여부를 떠나 일단 말하고 보는 것이다. 증세 없이 모든 노인에게 기초연금 20만 원 주겠다는 공약이 그러했고, 2014년까지 반값 등록금 공약을 실천하겠다는 약속이 그러했다.
다음은 ‘눈 가리고 아웅 하기’다. 박근혜 정부는 대부분의 공약을 이행하면서 이런 모습을 보였는데, 대표적으로 공약을 대폭 축소하는 방법이 있다. 실천 내용이 애초 제시했던 공약과 일치하는지를 떠나 일단 공약을 이행하려 했다는 모습을 보여야 하니 형편에 맞게 바꿔서 어설프게 공약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공약을 믿었던 국민들만 피해를 입었다. 박근혜 정부는 비정규직 근로자의 사회보험 가입률을 늘리기 위해 고용보험과 국민연금 보험료를 정부에서 100%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 공약은 보험료의 50%만 지원하는 것으로 축소됐고 비정규직 근로자에게 사회보험의 문턱은 여전히 높다.
기사를 쓰는 내내 박 전 대통령의 공약집을 끼고 살았다. 박 전 대통령이 약속한 ‘행복한 대한민국’과 지금의 대한민국 간의 괴리를 확인하는 작업은 힘겨웠다. 400장에 가까운 공약집이 무색하게 대한민국은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이 있다면 국민들의 삶이 이전보다 더 어려워졌을 뿐이다. 이런 박근혜 정부를 무능하다고 비판하고 분노하기는 쉽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를 직면하고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일은 쉽지 않다.
고등학교 중간고사였을까. 수학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시험을 망쳤다. 틀린 문제를 다시 보고 오답 정리를 해야했지만 바보 같은 실수들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다음 시험에는 안 나오겠지’, ‘다 아는 건데 실수해서 틀린 거야’라는 안일한 마음으로 중간고사 시험지를 한 쪽에 쳐박아 두었다. 다음 기말고사 때 어땠을까. 틀린 문제를 또 틀렸다.
틀린 시험지를 다시 보는 일은 실수를 인정하고 몰랐던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박근혜 정부는 공약 이행 시험지에 답을 안 쓰거나, 쓰다 말거나, 오답을 썼다. 그렇다고 이 시험지를 덮어두어야 할까? 혹자는 이미 실패한 정부의 공약을 구태여 들춰보냐고 물을지 모른다. 공약은 어차피 지켜질 리 없으니 관심 가질 필요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를 직면하지 않고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잘 못했는지’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조기 대선이 한달도 채 남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 공약의 오답 정리가 다음 대선의 반면교사가 됐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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